조건만남 미끼로 뜯어낸 돈 인출해 달라…대법 “체크카드 보관도 처벌”

by박정수 기자
2023.01.27 06:10:13

조건만남 협박으로 뜯어낸 돈 찾아 주면 수수료 10%
체크카드 전달받아 다른 장소 이동 중 체포
1심 전자금융거래법위반 유죄→2심은 무죄…“보관행위 대가 없어”
대법, 파기환송…“불법적인 이용 위한 보관도 처벌”

[이데일리 박정수 기자] 범죄 피해금의 인출을 돕기 위해 인출 수수료를 약속받고 체크카드를 전달받아 보관하는 행위도 처벌받는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사진=이데일리 방인권 기자)
대법원 1부(주심 대법관 노태악)는 ‘자금 인출 대가를 수수하기로 약속함과 동시에 범죄에 이용할 목적으로 접근매체인 체크카드를 보관했다’는 혐의로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죄로 기소된 사건에서 체크카드 보관에 대한 대가가 없었고 해당 카드가 범죄 실행에 직접 사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부분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한 원심 판결을 파기·환송했다고 27일 밝혔다.

피고인 A씨 2020년 9월 8일 대화명 B를 사용하는 성명불상자로부터 “조건만남을 수락한 불상의 피해자를 협박해 받아낸 돈을 체크카드 2장에 넣어 두었다. 체크카드 2장을 보내줄 테니 돈을 인출해 지정한 계좌로 보내주면 인출 금액의 10%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이를 승낙했다. A씨는 같은 날 오후 청주시 노상에서 체크카드 2장을 불상의 퀵서비스 기사로부터 전달받아 보관했다.

이에 앞서 경찰의 수사협조자인 C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각종 불법자금 깔끔하게 세탁해 드립니다’라는 내용으로 게시된 글을 발견했다. C는 지속적으로 게시된 홍보 글을 보고, 해당 글을 게시한 사람이 계좌를 모집하고 인출책들을 관리하는 조직의 관리자라고 생각하고, 대화명 B를 사용하는 성명불상자에게 접근해 “계좌 두 개가 확보됐으니, 체크카드를 수거해 달라”는 취지로 요청했고, 이러한 내용을 전부 경찰에게 제보했다.

C는 트윗을 보고 연락했다며 인출금의 14%를 수수료로 줄테니 출자(대포계좌에서 돈을 인출하는 인출책)를 부탁한다는 취지로 말해 대화명 B를 사용하는 성명불상자가 이를 수락하는 내용으로 대화했다. 이후 대화명 B를 사용하는 성명불상자가 ‘하루에 100만원 이상 벌어 가실 분 구함’이라는 광고를 냈고, 피고인 A씨는 이를 보고 대화명 B를 사용하는 성명불상자에게 연락했다.

이와 같은 피고인 A씨의 행위에 대해 검사는 ‘피고인은 대가를 수수·약속함과 동시에 범죄에 이용할 목적으로 접근매체를 보관했다’는 혐의로 전자금융거래법 제49조 제4항 제2호의 범죄로 기소했다.

1심에서는 쟁점 공소사실을 유죄로 판단했다. 특히 피고인 A씨는 타인 명의 휴대전화기 유심칩을 사들여 자신의 휴대전화에 착용, 전기통신사업법도 위반했다. 또 “60만원을 선입금하면 아이폰 11을 보내주겠다”고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게시한 뒤 돈만 가로채는 사기를 벌이기도 했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2019년경 이후 사기죄로 두 차례 처벌받은 전력이 있음에도 또 이 사건 사기 범행을 저지른 점, 피고인이 이 사건 전기통신사업법위반 범행에 이르게 된 경위 등에 비추어 피고인의 죄가 가볍지 않다”며 피고인의 연령, 환경, 범행 후의 정황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해 징역 8월을 선고했다.

2심에서는 징역 1년 2월에 처한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이 사건 각 공소사실 가운데 전자금융거래법위반의 점은 무죄라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피고인은 인출행위에 대한 대가로 인출금액의 10%를 수수료로 받기로 했을 뿐 보관행위에 대한 대가를 수수하기로 약속한 것이 아니다”며 전자금융거래법 제6조 제3항 제2호에서 금지하는 ‘대가 수수·약속 접근매체 보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또 이 사건 체크카드 2장은 경찰과 수사협조자가 피고인을 검거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둔 것일 뿐 실제 범죄의 실행에 직접 사용되거나 범죄의 수행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접근매체가 아니므로, 전자금융거래법 제6조 제3항 제3호에서 금지하는 ‘범죄 이용 목적 접근매체 보관’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타인 명의 금융계좌를 불법적으로 이용하는 행위에 대해 대가를 받기로 약속하고 그 불법적인 이용을 위해 접근매체를 보관한 경우라면 접근매체의 보관에 대응하는 경제적 이익을 약속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또 “전자금융거래법 제6조 제3항 제3호의 ‘범죄에 이용할 목적’은 이른바 ‘초과주관적 위법요소’로서, 그 목적에 대해는 미필적 인식이 있으면 족하고 목적의 대상이 되는 범죄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인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며 “이러한 목적은 본래 내심의 의사이므로 그 목적이 있는지는 접근매체를 보관하는 구성요건적 행위를 할 당시 피고인이 가지고 있던 주관적 인식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된다”고 했다.

이에 대법원은 “피고인은 타인 명의 금융계좌에서 범죄로 인한 피해금을 인출해 주는 일을 하고 수수료를 받기로 약속한 후 그 금융계좌에 연결된 접근매체를 전달받아 보관한 것으로, 대가를 수수하기로 약속함과 동시에 범죄에 이용할 목적으로 접근매체를 보관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