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숙 작가 "지진으로 인한 디스토피아…재해는 삶을 돌아보게 하죠"

by이윤정 기자
2020.04.08 00:30:00

네번째 장편소설 '부림지구 벙커X' 출간
재난 도시·벙커 안에서의 삶 그려내
"어려운 상황에서 작품 내 죄송한 마음"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배가 고파서 허리가 저절로 굽어졌다. 흔하디 흔했던 참치 깡통, 음료수병, 음식은 아니어도 달달한 액체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 빨아 먹을 수 있는 양념병이라도 찾고 싶었다. 정맥류 스타킹은 새까맣게 때가 낀 채 아프게 살을 파고들었고 온몸이 미역 줄기처럼 축축하게 젖었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시. 벌레를 고기로 생각하며 먹고, 오줌을 받아먹는 끔찍한 벙커 안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강영숙(53) 작가가 그린 디스토피아의 모습이다. 한국일보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과감한 필치로 생의 누추한 곳을 들춰냈던 강 작가가 네번째 장편소설 ‘부림지구 벙커X’(창비)로 돌아왔다.

이번 소설에서는 지진이 휩쓸고 간 도시 부림지구의 모습과 벙커 속에서도 끈질기게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코로나19로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지속되면서 집 안에서만 갇혀 사는 현재의 우리 모습과 겹쳐지며 삶을 곱씹어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강 작가는 7일 이데일리와 인터뷰에서 “최근에 열을 재고 마스크를 한 채 친척의 빈소를 찾은 적이 있다”며 “병의 전파를 막으려면 사람들과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낯설기도 하고 두렵다”고 말했다.

강영숙 작가는 “창작의 과정은 늘 불안과 두려움을 동반한다”며 “창작의 고통과 작품의 질은 별개라는 게 참 냉혹하다”고 말했다(사진=창비).


이번 소설은 2014년 강 작가가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머물 때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캘리포니아 전체는 지진 위험 지역으로 1906년에 대지진이 나서 도시 건물이 거의 다 파괴되기도 했다. 2007년에는 일본의 나가노에서 도쿄로 가는 길에 대형 주차장에서 지진을 직접 만나기도 했는데, 이런 경험들이 소설의 배경이 됐다.

“일본에서 잠깐 경험한 지진도 사실 굉장히 무서웠다. 초고는 아주 빨리 썼는데 어떤 벙커인지를 생각해내는 일은 시간이 꽤 걸렸다. 영화도 많이 보고 실제 재해의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 특히 재해 현장을 경험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많이 들어보려고 노력했다. 화자 유진이 내 나이 또래의 여성이기 때문에 어떤 부분은 또 나의 경험이기도 하다.”



벙커 안에는 유진을 포함해 열명 남짓의 사람들이 외부로부터 간간이 보급되는 ‘생존키트’와 벙커 밖의 쓸 만한 잔해에 의지하며 살고 있다. 오염지역의 이재민들이 부림지구를 떠나 근처의 N시로 이주하기 위해서는 몸에 생체인식 칩을 주입하고 ‘관리 대상’이 되어야 한다.

“나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미세먼지나 황사가 없는 깨끗한 하늘 아래서 살고 싶다. 갑자기 닥친 재난으로 삶이 순식간에 잘못되는 일이 없는 안전한 사회에 살고 싶은 마음이다. 이번 소설을 쓰면서 시골에서 혼자 살고 있는 친구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해준 얘기를 많이 참고했다. 작품에 나오는 대장처럼 새로운 리더십도 앞으로는 필요하다고 본다.”



전 세계 사람들이 코로나19로 유례없는 상황을 맞고 있다. 부림지구 벙커에서의 폐쇄된 상황이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얘기처럼 읽히지 않는 이유다. 강 작가는 “사람들이 벙커에 모여앉아 ‘지진 경험 이야기하기 대회’를 하는 장면이 있다”며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각자 겪은 일을 이야기하며 어려운 시간을 견디는 장면인데, 재해란 타인과 더 대화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가뭄, 해일, 바이러스 등 재난 상황은 그의 오랜 관심사였다. 단편소설 ‘해안 없는 바다’ ‘프리파트 창고’ ‘문래에서’를 비롯해 최근 웹진 비유에 게재한 ‘스모그를 뚫고’ 등이 재난을 소재로 했다. 강 작가는 “아무리 문학이 삶과 가깝다고 해도 삶의 여러 측면을 모두 문학 안에 들여올 수는 없다”며 “재해는 지나간 삶을 돌아보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내다볼 수 있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최근엔 출간작업 때문에 미뤄놨던 일들을 하느라 바쁘게 생활하고 있단다. 강 작가는 “지금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재난 소설로 독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어 죄송한 마음도 있다”며 “빨리 상황이 안정돼서 서울의 이곳저곳을 산책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