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저리인터뷰]폭염·미세먼지에도 7년째 1인 시위…“빨갱이 낙인이 두려웠다”

by조용석 기자
2019.01.21 06:00:00

한국전쟁민간인피학살자 유족회, 국회 시위 500차 돌파
2005년 과거사 한시법 있었지만 유족 대부분 신청 못해
“과거사법 다시 만들라”…19대 자동폐기, 20대 행안위 계류중
“70년 침묵한 정부 나서야…한국당, 낙선운동 할 수도”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 유족회가 지난 15일 국회 3문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오른쪽부터 윤호상 상임의장, 조순호 상임고문, 전극래 운영위원장(사진 = 조용석 기자)
[이데일리 조용석 기자] 본격적인 출근행렬이 시작되는 오전 8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의원회관 출입구인 ‘국회 3문’ 앞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 유족회 회원들의 1인 시위다. 얼핏 봐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살인적인 폭염이 기승을 부렸던 지난해 7월에도, 최악의 미세먼지 서울을 뒤덮었던 지난 14일에도 ‘과거사 특별법 즉각 제정하라’는 팻말을 들고 꿋꿋이 국회 3문 앞을 지켰다.

유족회의 국회 1인 시위가 500차를 맞은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하늘은 초미세먼지로 인해 잔뜩 찌푸렸다. 미세먼지로 인해 마스크를 착용하고 나온 조순호(76) 유족회 상임고문은 여느 때처럼 목에는 팻말을 걸고, 3문 표지기둥에는 노란색 플래카드를 동여맸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입법을 국회는 즉각 제개정하라’고 적힌 노란색 플래카드는 시간을 말해주는 듯 접힌 자국과 때가 탄 흔적이 곳곳에 역력했다.

윤호중(72) 유족회 상임대표의장은 “2013년 9월 26일 국회에서 처음으로 1인 시위를 시작할 때는 남문이었는데 어느 날 3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며 “국회가 열 때는 우리도 나오고 국회가 쉴 때는 우리도 쉬면서 7년째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족회 회원의 평균연령이 70세 중반이 훌쩍 넘다보니 초기 1인 시위를 함께했던 몇몇 이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들이 국회에서 수년째 시위를 벌이는 이유는 한국전쟁 전후 군인, 경찰 및 극우보수단체에 학살당한 가족에 대한 진상을 밝힐 수 있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과거사법)’을 통과시켜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다. 과거사법 개정안은 현재 소병훈·인재근·김해영 의원(민주당), 추혜선 정의당 의원, 권은희 바른미래당 의원 등이 다수 발의했으나 모두 국회 행안위 법안심사소위에 계류 중이다.

현재 유족회가 1인 시위를 벌이는 곳은 국회만이 아니다. 청와대 분수대 앞,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 자유한국당 간사였던 윤재옥 의원의 대구 지역구 사무실 앞, 바른미래당 간사인 권은희 의원의 전남 광주 지역구 사무실 앞에서 1인 시위를 동시에 벌이고 있다. 지난해 1월부터 시작한 청와대 앞 1인 시위도 100차가 훌쩍 넘었다. 윤 의장은 “추석·설날 등 명절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청와대 분수대 앞 시위를 꼭 한다”고 말했다.

앞서 과거사법은 지난 노무현 정부시절인 2005년 한시법으로 어렵사리 국회를 통과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를 기초해 만들어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는 접수기간을 1년으로 제한했고,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은 6712건만 조사하고 종료했다. 유족회 측이 자체 추산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자(약 113만명)와 비교해보면 사실상 거의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셈이다.



유족회는 신청이 저조했던 것에 대해 신청기간이 짧았던 점과 홍보부족으로 과거사법 자체를 몰랐던 이들이 많았다고 꼽았다. 그러나 다시 빨갱이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던 것을 가장 큰 이유로 보고 있다.

윤 의장은 “유족회는 1960년에 설립됐는데 그해 5월 유족회가 반국가 단체로 몰리면서 많은 간부들에게 사형이 선고됐다”며 “사형이 집행되진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유족회는 사실상 와해돼 2000년 전까지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했고, 회원 대부분도 빨갱이 취급을 받아 노태우 정부 때까지 지독한 연좌제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이어 “60년 만에 과거사를 해결한다고 했지만 유족들은 다시 빨갱이 올가미가 씌워지는 거 아닌지 두려워하다 대부분 신청 시기를 놓쳤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유족의 호소로 인해 지난 19대 국회에서 이낙연 의원(현 국무총리) 등이 과거사법을 발의했지만 제대로 논의도 못한 채 자동 폐기되고 말았다. 20대 국회 역시 다수의 관련 법안이 발의돼 있지만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반대로 전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유족회 측의 설명이다. 과거사법이 국회에서 공전하는 사이 대부분 70세가 훌쩍 넘은 고령의 유족들은 하나둘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부모와 형제를 따라가고 있다.

지난해 5월, 유족회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과거사 기본법 제정’을 촉구하는 모습(사진 = 뉴시스)
지난 2013년부터 국회 1인시위에 동참하고 있는 조순호 유족회 상임고문의 두 형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육군에 끌려갔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두 형의 나이는 각각 24세, 21세였다. 벼 20가마를 갖다놓고 방아를 찧고 있었던 두 청년은 다시는 고향인 전남 화순군 동면 마산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조 상임고문은 “대체 왜 한국군이 두 형을 데려갔는지를 모르겠다”며 “머슴살이 했던 두 형이 무슨 좌익 활동을 했겠나. 당시는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좌익 또는 우익으로 몰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윤 의장의 부친은 이승만 대통령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지식인이었다고 한다. 사비를 털어 고향인 전남 보성에 사립학교를 세웠던 윤 의장의 부친은 1950년 음력 6월 7일,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끌려갔고 그렇게 소식이 끊겼다. 이날 이후 윤 의장의 두 형은 혹독한 연좌제에 시달렸다.

그는 “유족들이 정말 바라는 것은 국가배상보다 우리 부모형제가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라도 알자는 것”이라며 “국가 공권력이 동족을, 민간인을 처참하게 죽였는데 70년 세월을 나 몰라라 해버리면 인권국가라고 이야기 할 수 있나. 과연 우리가 일본에 과거사 청산을 요구할 자격이 있나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유족회는 과거사법 처리를 의도적으로 지연시켜온 한국당 등에 대해 2020년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적 낙선운동을 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윤 의장은 “한국당이 PK(부산경남), TK(대구경북) 지역에서는 자신 있다고 오산을 하고 있다”며 “학살된 100만명의 유족이 연대해 움직여 낙선운동을 하면 한국당은 소멸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