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왠지 정이 가는 사람들

by최은영 기자
2018.10.17 05:00:00

[유영근 서울남부지방법원 부장판사]재판정에 꼭 그렇게 나쁜 사람들만 오는 것은 아니다. 잠깐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이다. 무고한 피해자도 있고, 억울한 피고인도 있고, 단지 목격자에 불과한

증인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법정에는 악하거나, 탐욕스럽거나, 인생이 한없이 꼬인 사람들만 모이는 곳으로 오해한다. 그러다 보니 평생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법원이 꼽히고, 인간관계가 뒤틀렸을 때 최종적으로 “법대로 하자”, “법정에서 보자” 같은 말들을 한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법정도 사람들이 만나 일종의 관계를 맺어가는 곳이다. 악연으로 만난 사람들은 꼬인 실타래를 풀어가야 하는 곳이지만, 판사와 사건 당사자 사이에는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법정에서 길지 않은 대화를 나누지만 거칠게 말해도 빠져드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매끄럽게 말해도 얄미운 사람이 있다. 재판이 계속되면서 딱히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묘한 감정이 쌓여가는 것이다. 어려운 심리학 용어를 가져올 필요 없이 그냥 쉬운 말로 ‘정(情)’이 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정에는 고운 정도 있고 미운 정도 있다.

하지만 재판은 인간사의 어떤 부분보다 이성적이고 실리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정이라는 것은 법관에게 일종의 금기(禁忌)로 통한다. 판사들은 극단적인 사건을 다룰 때에도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판단하도록 훈련받는다. 고려시대에 이미 한 선비가 읊었던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여’라는 시구는 개인적으로 늘 되새기고 경계로 삼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의 정이라는 것이 옳고 그름과 꼭 일치하진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한 선배가 ‘眞心對人(진심대인) 相對得心(상대득심)’을 사훈(社訓)으로 삼았다는 말을 들었다. 좀 낯설고 문법에 딱 맞는 것 같지도 않아서 어디에 나오는 말이냐고 물었다. 공자님 맹자님 말씀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 자신이 직접 만든 말이라고 했다. 세련된 그의 비즈니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한자어였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많이 배우고 치열하게 살아왔겠지만 그간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최고의 전략이자 전술은 결국 진심이었던 것이다.

재판이야말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진심에 의하지 않고 진실이 밝혀지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법정에서도 왠지 정이 가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진심이 들여다보이는 경우였던 것 같다. 진심이 들여다보인다는 것은 솔직담백하고 순수하다는 뜻이다. 솔직담백한 사람은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순수한 열정을 가진 사람은 다른 이익을 탐하지 않기 때문에 신뢰감을 준다.

반면 진심을 알아보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쉽사리 정이 가지 않는다. 예를 들면, 사소한 일인데도 과도하게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이나 중대한 사건 앞에서 지나치게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아니면 보편적인 감수성과는 다른 사고나 행동방식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양보 없이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하거나, 희생 없이 반성한다고 하는 사람 역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말로만 하는 설득과 반성은 일방적인 양보와 용서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상대적이어서 찾기 어렵고, 진심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실체가 모호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을 것 같아도 찾을 수 있는 것이 진실이고,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보이는 것이 진심이다. 실제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 사람도 있고, ‘아’ 다르고 ‘어’ 다르게 말해 사건의 해결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다. 재판 과정에서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정 역시 단순히 감정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표정과 태도, 그리고 양보와 희생이 구체화된 형태로 드러나야 생기는 것 같다. 법에도 눈물이 있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고, 비즈니스의 세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