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 속 태풍' 그친 행동주의…그래도 기업 변화 끌어냈다

by이슬기 기자
2019.03.25 05:40:00

KCGI 제안 주총 상정 못해…엘리엇은 현대차에 敗
한진그룹·현대차그룹, 행동주의 의식해 기업가치↑
"행동주의 앞으로도 활약…수정된 전략 내세울 것"
무리한 요구는 안돼…"행동주의·기업 동반자 돼야"

[이데일리 이슬기 기자] 정기 주주총회 시즌이 한창인 가운데 시장을 뜨겁게 달궜던 행동주의 펀드들의 움직임에 잇따라 제동이 걸리고 있다. ‘강성부 펀드’ KCGI의 주주제안이 주총 안건으로도 못 올라간 데 이어,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와(엘리엇)의 주총 표대결에서도 현대차그룹이 완승했기 때문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주주가치 제고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진 만큼 이들의 패배가 향후 주주 행동주의 성장에 지양분이 되리라고 내다봤다.

한진칼(180640)은 서울고등법원의 결정에 따라 주총 안건에 조건부 상정했던 KCGI 측의 주주제안을 삭제키로 했다고 21일 밝혔다. 앞서 한진칼은 법원에서 KCGI가 한진칼 지분 보유 기간이 6개월이 되지 않아 상법에 따라 주주 제안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KCGI는 상법 제363조2에 따라 의결권 없는 주식을 제외한 발행주식 총수의 3% 이상을 갖고있어 정기 주총 6주 전까지 안건을 제안할 수 있다고 맞섰다.

그러나 법원이 한진칼의 손을 들어주면서 KCGI가 낸 주주제안은 주총서 목소리도 못 내게 됐다. KCGI는 그레이스홀딩스를 통해 한진칼 지분 12.80%를 보유한 2대 주주로, 이번 한진칼 주총에서 감사 선임과 사외이사 선임 등 총 7건을 주주 제안한 바 있다.

한편 22일 열린 현대차(005380) 주총에서는 엘리엇이 제안한 안건이 모두 부결되며 사측에 완패했다. 이날 현대차 이사회가 제안한 보통주 1주당 3000원 배당안은 찬성률 86%로 통과됐다. 엘리엇은 이사회가 제안한 배당금의 7배가 넘는 보통주 1주당 2만 1967원의 배당을 요구한 바 있으나 이날 주총서 13.6%의 찬성표밖에 모으지 못했다. 같은 날 현대모비스(012330) 주총에서도 엘리엇의 요구는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2일 열린 세이브존I&C의 주총에서도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인 홀드코자산운용이 주당 400원의 배당안을 주주제안으로 올렸지만, 부결됐다. 이는 회사측이 제시한 주당 50원에 비해 8배나 많은 수준이다. 지난 21일 개최된 강남제비스코 주총에서도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인 SC펀더멘털이 요구한 주당 배당금 4000원의 주주제안이 부결되고 회사측의 주당 550원 안이 승인됐다.



시장의 눈길을 끌었던 행동주의 펀드들이 잇따라 설욕을 맛보자 이제 막이 오르기 시작한 주주 행동주의도 일단 속도를 줄이게 됐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행동주의 펀드의 활약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행동주의 펀드들이 주장했던 부분들이 받아들여지지 않기도 했지만 행동주의 펀드와 기업 간의 다툼이 여기서 완전히 끝났다고 보긴 어렵다”며 “주주권 행사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건 분명하고, 행동주의 펀드들이 다른 기관투자자나 주주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수정된 전략을 내세움으로써 앞으로 주주가치 제고에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주총에선 쓴맛을 본 행동주의 펀드지만 기업의 변화를 이끌어내며 소기의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KCGI와 국민연금의 압박을 받던 한진그룹은 지난달 경영 쇄신안을 발표했다. KCGI의 서울 송현동 용지 매각 요구 등을 수용하는 한편, 한진칼에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된 감사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또 현대차그룹 역시 엘리엇이 행동에 나서자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하는 등 주주가치 극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은 2023년까지 향후 5년간 45조원을 연구개발(R&D)에 투자하기로 했다. 연평균 투자액은 약 9조원으로, 과거 5개년 연평균 투자액(5조 7000억원)과 비교하면 58% 이상 늘어난 규모다. 이밖에 잉여현금흐름(FCF) 30~50% 배당 기조 아래 수익성 개선에 기반한 주주환원 확대를 이어가겠다고도 강조했다.

다만 엘리엇의 사례를 통해 주주가치 훼손으로 이어질 만한 과도한 요구는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는 시장의 인식도 명확해졌다.

최웅필 KB자산운용 밸류운용본부 상무는 “엘리엇은 현대차의 주가가 많이 빠진 상황에서 당상 보상 받기 원하는 마음에 고배당을 요구했던 것 같은데 기업을 동반자라고 생각한다면 기업가치를 훼손할 만한 이런 요구는 할 수 없다”며 “행동주의 펀드도 같은 주주로써 기업이 생존하고 커가는 데에 힘을 실어주는 한편 합리적인 선에서 주주환원을 요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