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로 국보 지정된 숭례문, 두번째는?[알면 쉬운 문화재]

by이윤정 기자
2023.03.25 07:00:00

'원각사지 10층 석탑' 두번째 국보 지정
정교한 탑신·섬세한 표면 조각 특징
조선시대 석탑 중 최우수 걸작
18세기 실학파 '백탑파' 거점

우리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뿌리가 담겨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도 있듯이 수천, 수백년을 이어져 내려온 문화재는 우리 후손들이 잘 가꾸고 보존해 나가야 할 소중한 유산이죠. 문화재는 어렵고 고루한 것이 아닙니다. 문화재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 쉽고 친근하게 배울 수 있는 문화재 이야기를 전합니다.<편집자주>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배웠던 수많은 내용 중에서도 ‘국보 1호’가 남대문(숭례문)이라는 것은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합니다. 2008년 2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면서 전 국민적인 안타까움을 안겼지만, 화마의 상처를 딛고 복원 작업을 거쳐 2013년 5월 다시 문을 열었죠.

사실 지금은 국보 몇호, 보물 몇호라고 지정번호를 사용하진 않습니다. 문화재청에서 국보와 보물, 사적 등 국가등록문화재를 표기할 때 지정번호를 표기하지 않도록 2021년 지정번호제도를 개선했기 때문이죠. 문화재 지정번호는 국보나 보물 등 문화재를 지정할 때 순서대로 부여하는 번호입니다. 하지만 일부에서 문화재 지정순서가 아닌 가치 서열로 오인해 서열화 논란이 제기되는 경우가 있어 지정번호제도를 개선했죠.

그렇다면 두번째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는 무엇일까요? 동대문일까요? 동대문(흥인지문)은 국보가 아닌 ‘보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두번째로 지정된 국보를 아는지 물어보면 머리를 긁적이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오늘은 중요한 문화유산이지만 많은 이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두번째 국보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두번째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입니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 가면 볼 수 있어요. 탑골공원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독립운동의 기치를 올린 곳이에요. 이곳엔 원래 세조 11년(1465년)에 세워진 원각사라는 절이 있었는데요. 1504년 연산군이 자신의 유희를 위해 ‘연방원’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면서 절은 없어지고 터만 남게됐지요. 석탑은 사찰 창건 당시의 건조물이에요. 탑의 윗부분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년)에 만들어졌음이 확인됐어요. 그래서 이 탑을 원각사지 10층 석탑이라고 부른답니다. 원각사지의 ‘지(址)’는 터라는 뜻이에요.



원각사지 10층 석탑(사진=문화재청).
‘원각사지 10층 석탑’의 높이는 약 12m입니다. 하늘로 쭉 솟아오른 날렵한 몸매와 층층이 화려하고 정교한 탑신(塔身·몸체), 표면 조각을 갖추고 있어요. 독특하고 이국적인 매력을 지녔죠. 지붕과 기둥 등이 섬세하게 표현돼 있고 의장(意匠·장식)이 풍부해 조선시대 석탑으로는 최우수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탑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亞)자 모양입니다. 정사각형이 있고, 네 개의 변으로 직사각형이 튀어나온 모습이어서 ‘아자형’이죠. 고려때 경천사지 10층 석탑이 라마교 탑의 영향을 받아 제작됐고,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경천사지 석탑을 모방해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지금도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헷갈려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층마다 여러가지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이 돼 있어요. 용과 사자, 모란과 연꽃을 비롯해 부처와 보살, 삼장법사와 손오공 등 서유기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찾아볼 수 있죠. 모두 섬세한 수법으로 새겨져 조선시대 석탑으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수한 조각솜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려한 장식을 새길 수 있었던 비결은 석탑의 재료에 있어요.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인 재료는 화강암인데 반해 원각사지 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었습니다. 대리석은 화강암에 비해 부드러워요. 따라서 탑의 각 표면에 정교한 조각을 넣을 수 있었던 겁니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의 표면 장식(사진=문화재청).
원각사지 석탑은 18세기에 실학파의 거점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했어요.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은 원각사 터 주변에 있는 자신의 집들을 오가며 시대와 백성을 고민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백탑파’(白塔派)라 부르는데요. 탑골 백탑 아래에서 모임을 가졌기에 붙은 이름입니다. 백탑은 말 그대로 ‘하얀탑’이라는 뜻이에요. 대리석으로 만든 원각사 탑이 화강암으로 만든 여느 탑보다 더 하얗기 때문입니다. 이후 189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 원각사 터에는 근대식 공원이 조성됐어요. 이때부터 우리는 이곳을 탑골공원 혹은 파고다공원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현재 석탑은 유리 보호각 안에 들어가 있어요. 야외 석조 문화재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데요. 비둘기가 배설물을 쏟아내기도 하고 산성비의 피해도 심각했죠. 그러다 1990년 누군가 돌을 던져 탑의 표면 일부가 훼손되는 사고가 발생했어요. 석탑의 훼손을 막기 위해 2000년 유리 보호각을 만들어 탑을 완전히 덮어 씌우게 된거죠. 원각사 탑의 정교한 매력을 제대로 느끼기는 아쉬워졌지만, 그래도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하네요.
유리 보호각을 씌운 원각사지 10층 석탑(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