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린 동양화에 담긴 '파격'

by김용운 기자
2014.11.14 06:42:00

김호득 '그냥, 문득' 전
광목에 그린 수묵·좌우 뒤집힌 한글 등
현대적이면서 '여백의 미' 살려 눈길
화선지와 먹 이용한 설치미술도 시도
김종영미술관서 12월5일까지

김호득 화백이 12월 5일까지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리는 개인전 ‘그냥, 문득’에 전시된 ‘그냥’ 앞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 화백은 “생각들이 그물에 잡힐 때 그 느낌을 그대로 살려 붓을 놀린다”고 자신의 창작 과정을 밝혔다(사진=김용운 기자).


[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생각들이 그물에 잡힐 때가 있다. 그때 그 느낌을 살려 붓을 긋는다. 예전에는 노자·장자 등 동양철학 서적을 많이 읽었고 영향도 받았지만 지금은 그냥 마음이 내키는 대로 그린다.”

40여년간 수묵화를 그리다 보면 어느덧 ‘도’가 트이는 것일까. 동양화가 김호득(64·영남대 교수)은 “그냥”이란 말을 몇번이고 반복했다. 12월 5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리는 개인전의 제목도 ‘그냥, 문득’이다.

김 화백은 한국화단에서 수묵화로 한 길을 걸어온 대표적인 작가로 손꼽힌다. 그렇지만 김 화백이 처음부터 동양화에 사명감을 가졌던 건 아니다. 어렸을 적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어 각종 미술대회를 휩쓸었던 김 화백은 대학 2학년까지만 해도 서양화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러던 김 화백이 한평생 묵향과 마주하게 된 계기는 서양화와 동양화로 전공을 나누던 대학 3학년부터였다. 술을 좋아했던 김 화백은 동양화 전공의 선배들에게 미리 ‘낙점’을 당했다. 집안이 넉넉지 않았던 형편상 해외유학이 필요 없는 동양화가 부담이 없기도 했다.

그래도 동양화는 표구값이 만만치 않았다. 김 화백은 서양화를 전공한 학생들이 버린 캔버스를 주워 천을 뜯어내고 아교를 먹인 광목을 씌웠다. 재료비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 그 위에 먹물로 선을 쳤다. 김 화백을 동양화단에 각인시킨 ‘광목에 그린 수묵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김 화백은 사군자나 서예 등 기존 동양화의 소재에서 벗어나 단순하면서도 현대적인 한국화를 추구했다. 한국화가 전통의 유지에만 급급할 때 과감하게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간 것이다. 화선지와 먹을 이용한 설치미술도 시도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계곡변주’ 시리즈를 비롯해 한글단어 ‘물’을 쓴 ‘그냥, 물물’, 바닥에 대형벼루처럼 생긴 구조물을 설치하고 그 위에 한지로 만든 사면체를 세운 ‘그냥, 문득’ 등과 함께 세 번의 큰 획으로 폭포를 표현한 ‘그냥, 폭포’와 하늘거리는 한지의 특성을 활용해 설치작품이면서 동시에 회화작품인 ‘쌓여만 가네’ 등 대표작들을 선보인다.

김호득 ‘계곡변주’(사진=김종영갤러리)’


김 화백은 “동양화는 빈 공간인 여백을 중요시한다”며 “그림 속 여백이 평면이 아닌 공간에서도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설치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덕분에 힘찬 필치의 회화작품과는 다른 설치작품 ‘그냥, 문득’과 ‘쌓여만 가네’ 등에서는 현대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듯하면서도 동양적인 고요와 단아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김 화백 작품의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김 화백은 “단순히 평면에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공간에 그리는 것에도 관심이 많다”며 “회화면서도 회화가 아닌 조형물을 만들려고 하는데 그런 것이 바로 언어로 규정되지 않는 동양의 예술인 듯하다”고 덧붙였다.

김 화백은 내년에 정년퇴임한다. 강단을 떠나는 스승을 위해 제자들이 무엇을 준비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손사래를 쳤다. “개인전 하면 오라고도 하지 않는다. 교수들이 제자들에게 받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긴다. 그냥 가볍게 저녁이나 먹을 생각이다.” 02-3217-6464.

대형 벼루를 형상화한 구조물에 한지로 만든 사면체를 세운 김호득 화백의 설치작품 ‘그냥, 문득’(사진=김종영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