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축 멈추는 美연준]①믿음의 붕괴, 물가 미스터리

by안승찬 기자
2017.07.21 04:00:00

고용지표 호조에도 물가 주춤하자 금리 인상 신중론 부상
고용이 물가 영향 미친다는 ‘필립스 곡선’ 무용론까지
옐런 의장도 한발 뒤로..시장선 “내년 3월까지 美금리인상 안 할 것”
저임금 인력 유입, 생산성 하락 환경변화..금리인상, 물가에 달렸다

/로이터


[뉴욕=이데일리 안승찬 특파원] 모든 강물이 결국 바다로 흐르듯, 고용과 물가 사이에도 일정한 방향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고용시장이 좋아지면 결국 물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주 당연한 얘기다. 경기가 좋아지고 고용이 늘어나면 실업률이 떨어진다. 기업은 일할 사람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아쉬운 쪽은 기업이 된다. 한 푼이라도 더 얹어주게 된다. 전반적인 임금이 올라간다. 기업은 올라간 인건비를 제품 가격에 반영한다. 곳곳에서 임금이 올랐으니 사람들의 주머니가 한층 두둑해진다. 사람들은 값이 올라간 물건을 흔쾌히 구매한다. 결국 물가는 올라간다.

고용에서 시작해 결국 물가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실업률이 낮아질수록(고용시장이 좋아질수록) 물가가 높아진다는 이 뻔해 보이는 이론을 경제학자들은 ‘필립스 곡선’이라고 부른다. (1958년 영국의 경제학자 월리엄 필립스가 처음 주장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필립스 곡선은 경제학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아주 보편화한 이론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실업률이 낮은데 물가가 이상하리만치 올라가지 않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물가가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왜 그대로지?’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믿음에 의심이 싹튼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미국의 기준금리 결정을 둘러싼 ‘물가 미스터리’다.

보통 미국 연준은 고용 시장 상황을 유심히 살핀다. 그리곤 고용이 좋으면 미리 기준금리를 올려 돈줄을 죄기 시작한다. 고용 시장이 좋으면 앞으로 물가가 올라갈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물가가 오른 이후에 통화정책을 동원하면 자칫 뒷북을 칠 수 있다고 걱정한다. 지난 6월 연준이 기준금리 인상을 결정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당시 미국의 실업률은 4.3%(5월)까지 떨어졌다. 16년 만에 가장 낮은 수치다. 미국은 사실상 완전 고용 상태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고용 상황이 좋다. 그런데 물가는 딴판이다. 연준이 핵심적인 물가 지표로 삼는 근원 개인소비지출(PCE) 물가지수는 작년과 비교해 1.5% 상승에 그쳤다. 목표치인 2%와 거리가 멀다. 석달째 계속 낮아지는 추세다. 그래도 연준은 금리를 올렸다.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은 ‘지금은 그래 보여도 결국 물가는 올라갈 것’이라고 판단했다. 옐런 의장은 필립스 곡선의 신봉자다.

그런데 미국의 물가는 올라가기는커녕 더 내리막을 걸었다. 지난 5월 근원 PCE 물가지수는 1.4% 상승에 그쳤다. 4월(1.5%)보다 더 낮아졌다. PCE보다 먼저 발표되는 선행지표 성격의 6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도 1.6%로 더 떨어졌다. 연준 내부에서 신중론이 급부상했다. ‘아무래도 상황이 달라진 것 같다’는 거다.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9명의 연준 위원 중에서 절반이 넘는 5명의 위원이 물가가 올라가는 걸 눈으로 확인한 이후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대표 ‘매파(긴축적인 통화정책 옹호)’인 패트릭 하커 필라델피아 연방준비은행 총재마저 추가 금리 인상에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다.



결국 옐런 의장도 한발 물러섰다. 그는 최근 미국 하원 청문회에 출석해 물가의 “불확실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만약 물가 부진이 계속되면 (통화)정책을 조정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추가 금리 인상을 늦출 수 있다는 강력한 신호다. 시장에서는 내년 3월까지 금리 인상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미국의 실질 시간당 임금 상승률(좌축, 파란 선. 전년비 %)과 실업률(우축, 붉은 선). 실업률이 크게 떨어졌지만, 임금 상승률이 높지 않다.(자료=블룸버그, 키움증권)
필립스 곡선의 잘 들어맞지 않는 이유에 대해선 다양한 분석이 나오지만, 저임금 인력의 유입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많다. 필립스 곡선은 실업률이 떨어지면 사람 구하기 어려워지고, 그래서 임금을 올려주는 기업들이 많아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런데 미국에 꾸준히 ‘쥐꼬리만 한 임금도 괜찮다’는 이민자들이 들어온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쉬울 게 없는 기업은 임금을 올릴 필요가 없다. 기업이 임금을 올리는 대신 인건비가 싼 해외 공장으로 일감을 돌려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이미 국경의 의미가 희미해진 시대라는 점을 고려하면, 실업률이 낮아도 임금이 올라가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지난 4개월간 미국의 평균 임금상승률은 한해 전과 비교해 1.7% 상승에 그쳤다. 이는 지난 3년간 가장 낮은 수치다. 임금이 정체된 상황에서 물가가 올라갈 리 없다.

미국의 생산성이 낮아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생산성은 낮아졌다는 건 차의 엔진이 낡았다는 말과 같다. 낡은 엔진 때문에 휘발유를 가득 채워도 얼마 가지 못한다. 생산성이 떨어지면 같은 노동력을 투입해도 생산물이 별로 많지 않다. 많은 노동인구가 투입돼 열심히 공장을 돌려도 성장은 예전만 못하다. 당연히 물가도 기대만큼 올라가지 않는다. 2000년부터 금융위기 전까지 농업 부분을 제외한 미국의 노동생산성은 매년 평균 2.6%씩 증가했지만, 2008년 이후부터는 평균 1.2%로 급격하게 낮아졌다. 1970년대 수준으로 돌아갔다. 생산성이 낮아진 지금의 미국은 환경 자체가 달라졌다.

미국의 생산성 상승률. 2007년 이후 눈에 띄게 낮아졌다.
‘60년이나 된 구닥다리 이론을 아직도 믿느냐’며 필립스 곡선 무용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옐런 의장은 여전히 미련이 남는다. 이전보다 한발 물러서긴 했지만, 생각을 완전히 바꾸지 않았다. 옐런 의장은 물가가 부진한 건 “일시적인 요인 때문”이라고 믿는다. 원래대로라면 고용 상황이 좋으니 필립스 곡선이 예견한 대로 물가가 올라야 하지만, 마침 통신비와 약값이 떨어지면서 물가가 덜 올랐다는 것이다. 그는 “물가가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란 예상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연준 내부에서도 필립스 곡선을 추종하는 이들이 여전하다. 연준의 이코노미스트인 데트메이스터와 바브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필립스 곡선의 기울기가 과거보다 완만해진 것(고용과 물가의 상관관계가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실업률이 장기적인 평균 실업률 밑으로 떨어진 2015년 이후부터는 유효성이 강화되고 있다는 분석 결과는 내놓았다. 미국의 장기 평균실업률은 4.6%인데, 지금의 실업률(4.4%)은 이보다 더 낮다. 객관적으로 봐도 고용이 좋으니, 조금 지연되더라도 결국 물가는 위로 올라가게 될 것이란 주장이다.

결국 모든 건 물가에 달렸다. 물가가 올라가느냐 마느냐에 따라 미국의 추가적인 금리 인상 여부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춘욱 키움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앞으로 발표될 인플레이션 지표의 방향, 특히 실질임금의 동향이 연준의 추가적인 금리 인상 여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