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잘돼 떠날 땐 한술 뜨고"…'진달래 고봉밥' 모정

by오현주 기자
2017.05.08 00:14:00

갤러리작 10주년전 '축복 가득한 세상'
김정수 '진달래-축복' 연작
'물방울 화가' 김창열 '회귀'
이왈종 '제주생활의 중도' 등
독창성·개성 강한 작가 5인
회화·조각 20여점 31일까지

김정수의 ‘진달래-축복’(2016). 대소쿠리에 수북이 얹어 ‘진달래 모정’을 전한 동명연작 중 한 점이다. 200호 대작이 나와 눈길을 잡는다(사진=갤러리작).


[이데일리 오현주 선임기자] 진달래꽃 아름 따다 뿌린다고 했던가.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가는 걸음걸음 사뿐히 즈려밟아도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고. 김소월의 ‘진달래꽃’(1925)은 서러움이었다. 떠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고 매달리지 않고 ‘쿨’하게 보내주겠다. 다만 진달래꽃으로 대신 전하는 내 처절한 사무침은 알아 달라. 그러니 밟고 가라. 그게 속이 편하겠다.

90여년이 지난 뒤 이제 진달래꽃은 바구니에 수북이 얹힌 고봉밥이 돼 있다. ‘진달래 화가’ 김정수(62)가 세상에 내놓은 ‘진달래 고봉밥’이다. 밥그릇도 한가득, 대소쿠리에도 한가득, 소반에도 한가득이다. 온종일 진달래꽃잎과 씨름한 지 20년을 훌쩍 넘겼다. 처음에는 소소한 상차림이었다. 10호 안팎의 캔버스에 소담스럽게 얹어 내던 모양이 100호를 넘기더니 이제 200호(194×259㎝)에 이르렀다. 진달래꽃으로만 꾸린 거대한 잔칫상이 된 거다.

이 대작은 서울 서초구 양재동 갤러리작에서 여는 기획전 ‘축복 가득한 세상’에 나왔다. 그간 갤러리작과 꾸준했던 인연을 축하라도 하려 했나. 이번 전시는 갤러리작의 개관 10주년을 기념한다. 2007년 강남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낙후했던 문화환경에 ‘겁도 없이’ 덥석 미술공간을 차린 뒤 강산이 한번 바뀌었다.

김 작가의 진달래꽃은 김소월의 그것과는 다르다. 어머니의 정서가 깃들어 있다. 어린 시절 작가의 어머니는 봄만 되면 “내 아들 잘돼라”며 연신 진달래꽃잎을 뿌렸단다. 그래서인가. 작품명은 늘 ‘진달래-축복’이다. 편안해보이는 그림이라고 그리기도 수월했던 건 아니다.

우선 색. 아마포 위에 바탕색을 칠해 짙은 붉은색이 배어 나오게 한 뒤 흰색·검은색·푸른색·분홍색 등을 덧입혀 원하는 진달래색이 나올 때까지 우려낸다. 너무 진하면 철쭉이 되고 옅으면 벚꽃이 되는 탓이다. 다음은 꽃잎. 세필로 하나하나 꽃잎을 ‘심어’내는 중노동이다. 이 모진 작업에 병까지 얻었다고 하니 어떤 삶을 보듬는 일이 이보다 고될까. 떠올릴 어머니 마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을 거다. 이번 전시에 작가는 200호 대작 ‘진달래-축복’(2016)을 포함해 크고 작은 동명연작 5점을 내놨다.

개관 10주년에 걸맞게 전시는 개성과 독창성에선 둘째라면 서러워 할 작가도 여럿 나섰다. ‘물방울 화가’ 김창열(88)의 ‘회귀’(1993)가 걸렸다. 이내 사라질지도 모르는 물방울을 극사실적으로 잡아낸 미학으로 40년 화업을 이어온 그에게 물방울은 전쟁·사랑·고통 등 직접 체험한 삶의 결정체다. 1990년대 이후에는 인쇄체로 쓴, 아니 그린 ‘천자문’을 그림에 올리는데 ‘회귀’는 이를 포함해 캔버스를 3분할한 흔치 않은 배치가 눈길을 잡는 작품.



김창열의 ‘회귀’(1993)(사진=갤러리작).


제주도의 풍광과 일상의 희로애락을 담아온 한국화가 이왈종(72)의 ‘제주생활의 중도’(2015)도 나왔다. 화사한 원색에다 꽃·새·나무·풀, 하물며 사람과 자동차까지 붕붕 떠다니는 중력을 빼버린 그림에선 경쾌함과 발랄함이 묻어난다. 크기도 제각각.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자연과 사물이 하나 되는 평등·화합을 염원하는 ‘중도’(中道)의 생활철학이 그것이다. 그림 말고 유일한 취미라는 골프는 그의 작품에 단골 소재. 장지에 이보다 더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화를 그려내는 그는 전통 동양화의 한계를 훌쩍 넘어섰다.

이왈종의 ‘제주생활의 중도’(2015(사진=갤러리작).


프랑스 파리에서 추상조각의 거장으로 활동했던 문신(1923∼1995)과 아내인 서양화가 최성숙(69) 부부의 작품도 나섰다. ‘노예처럼 일하고 신처럼 창조한다’는 좌우명이 유명한 문 작가는 스스로 내뱉은 말만큼 ‘노예와 신’을 넘나드는 치열한 작품세계를 내보인다. 한국의 전통예술을 현대적 미감으로 승화해 좌우대칭이 뚜렷한 기하학적 구도로 세계를 혹하게 만들었다. 전시에선 그의 철학을 반영한 브론즈조각 ‘무제’(1980)가 기다린다.

서양의 물감으로 동양의 정서를 그려낸 최성숙의 ‘축제’(2014)가 나란히 걸렸다. 잔뜩 내려앉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친 눈발 탓에 세상은 온통 회색빛. 그래도 봄이 오고 꽃이 피면 풍작으로 행복할 거란 희망 가득한 농악축제가 애잔하게 시선을 붙든다. 가슴 절절한 시대적 교감을 색과 붓질에 남김없이 묻혀낸 작품이다.

전시는 31일까지. 한국적 정감을 잔뜩 묻혀 소란스럽지 않은 전경으로 마음을 뒤흔드는 20여점이 자리를 지킨다.

문신의 ‘무제’(1980)(사진=갤러리작).
최성숙의 ‘축제’(2014)(사진=갤러리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