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호의 그림&스토리]<7>미나리 같은 아낙네도 "밥이 하늘이다"

by오현주 기자
2021.03.26 03:30:01

▲윤두서·윤용 '나물 캐기'로 본 여성의 강인함
엄격한 성리학 틀 아래 고단한 조선여인 삶
보릿고개에 봄 오면 호미 들고 들판에 나가
가족 지키려는 여성의지 드러낸 '노동 현장'
코로나발 현대판 춘궁기 이들처럼 이겨내길

윤두서가 그린 ‘나물 캐기’. 정확한 제작시기는 전해지지 않고 18세기 초로만 알려졌다. ‘채애도’(採艾圖)란 이름으로 ‘윤씨가보’에 전한다. 모시에 먹으로 그린 그림으로 30.4×25㎝ 크기다. 해남 윤씨 종가가 소장하고 있다.


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봄의 향기가 진동합니다. 봄에 피어나는 향기는 봄꽃 때문이기도 하지만 봄나물 때문이기도 합니다. 파릇하고 여려 보이지만 얼어붙은 동토를 뚫고 나온 봄나물이 퍼트리는 진한 향은 그 어떤 식재료보다 매혹적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어머니는 직접 담근 된장으로 쑥국을 끓여주시곤 했습니다. 냉이나물과 고들빼기김치도 봄 식탁에서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뿐인가요. 쑥부쟁이, 소루쟁이, 민들레, 참죽순 등등. 이런 봄나물은 모두 강인한 생명력을 품은 먹거리라 춘곤증으로 나른한 시기에 제대로 효능을 발휘합니다. 원기를 회복시키고 면역력을 높여줍니다.

이렇게 산과 들에서 파릇한 나물들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나물 캐기’를 주제로 한 그림들입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단연 공재 윤두서(1668∼1715)의 ‘나물 캐기’라 할 겁니다. 윤두서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조선중기 선비화가입니다.

노동하는 여성의 고단함…남의 집 여인 뒷모습 그린 파격도

작품은 봄날에 나물 캐는 두 아낙네를 그리고 있습니다. 나물 캐는 그림이란 뜻으로 ‘채애도’(採艾圖)라고도 합니다. 왼쪽 여인은 한 손에 다래끼를,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허리를 굽혀 막 나물을 캐려는 모습입니다. 오른쪽 여인은 캘 나물을 찾는 듯 뒤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두 여인 모두 허리까지 내려온 저고리를 입었고 치마는 거추장스러운 듯 무릎 위까지 걷어 올렸습니다. 또 머리에는 수건을 썼는데, 조선후기 문인화가이자 평론가로 활동한 이하곤(1677∼1724)은 이 수건을 호남의 풍속으로 소개하며 “남쪽 지방에선 유독 머리에 수건 두르기를 좋아한다”란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런 수건은 지금도 농가에서 일하는 여성에게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림 속 배경도 한번 볼까요. 산은 산등성이를 윤곽선만으로 간결하게 표현했고 아낙네들이 서 있는 비탈은 풀과 자갈이 조금일 뿐 역시 간결하게 표현했습니다. 다만 비탈의 경사가 매우 가팔라 조금은 위태로워 보입니다. 윤두서는 이 가파른 경사를 통해 여인들의 고단하고 위태로운 삶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왼쪽 상단이 조금 허전했던지 새 한 마리 날려 두고 ‘방형백문’(方形白文)으로 호인 ‘공재’와 자인 ‘효언’을 낙관했습니다. 가파른 산등성이와 비탈로 불안정해진 구도는 오른쪽 여인이 고개를 뒤로 돌린 덕에 적잖이 해소가 됐습니다. 왼쪽으로 쏠리는 무게를 덜어낸 것입니다.

윤두서는 ‘나물 캐기’ 외에도 ‘짚신삼기’ ‘경전목우도’ 등을 그려 김홍도·조영석보다 훨씬 이전부터 풍속화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사실 ‘나물 캐기’는 민가의 생활상을 묘사한 풍속화의 개척을 넘어서 당시로선 파격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입니다. 남녀유별이 엄격하던 시대에 선비가 아녀자의 뒷모습을 그린 점은 매우 도전적인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노동하는 여성, 여성노동의 현장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선비화가 윤두서가 알고 느낀 노동과 땀의 가치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질끈 동여맨 수건, 야무지게 걷은 소매…‘여성의 땀’을 안 조부와 손자

해남 윤씨의 이런 화풍은 윤두서의 후대에도 이어졌습니다. 손자 윤용(1708∼1740)은 ‘협롱채춘’(挾籠採春)을 남겼는데 ‘나물 바구니를 끼고 봄을 캐다’란 뜻입니다. 배경 없이 넓은 화면의 아래쪽에만 그려져 혹시 미완성이 아닐까 의문도 들지만 낙관까지 마무리한 것으로 봐선 완성품입니다.



화면에는 오직 뒷모습의 여인 한 사람만 있습니다. 여인은 선 채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머리에는 흰 누비수건을 쓰고 뒤로 단단히 묶었는데 수건 아래로 머리카락이 살짝 보입니다. 왼손은 농기구를 들고 오른쪽 어깨는 망태기를 끼고 섰습니다. 농기구는 언뜻 낫처럼 보이지만 낫이 아닌 호미입니다. 예전에는 그림처럼 목이 긴 호미도 많이 사용했습니다. 최근 세계 최대 온라인쇼핑몰 아마존에서 우리나라 영주대장간에서 제작한 호미가 돌풍을 일으켰는데, 그 호미도 그림처럼 목이 깁니다. 정원을 꾸미는 도구로 고작 꽃삽을 사용한 외국에서 한국의 호미를 사용해 본 이들은 “어메이징”과 “원더플”을 외쳤다고 합니다.

윤용의 여인 역시 소매를 접어 올렸고 치맛자락은 위로 올려 허리춤에 찔러 넣었습니다. 그 아래로 속바지를 입었는데 속바지도 무릎 아래까지 올려 단단히 묶은 상태입니다. 여성치고는 단단한 종아리 근육이 보이고, 발에는 짚신을 신었습니다. 주위에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파릇파릇한 봄나물을 놔두고 여인은 허리를 세운 채 오른쪽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과연 여인은 어디를 보고 있을까요. 함께 나온 아이를 찾는 걸까요. 어디선가 새소리를 들었을까요. 아니면 앞으로 더 일해야 할 넓은 땅을 봤던 걸까요.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키지만 분명한 것은 화가는 여인의 강인함을 표현하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머리에 단단히 묶은 수건, 야무지게 들고 있는 날 선 호미, 씩씩한 옷차림, 단단한 종아리 근육 등이 어떤 힘겨움도 견뎌내겠다는 당찬 여성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30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화면 밖으로 뿜어내면서 말이지요.

윤용이 그린 ‘협롱채춘’(挾籠採春·18세기). 나물 바구니를 끼고 봄을 캔다는 뜻이다. 주로 산수화를 그린 그가 남긴 유일한 풍속화로, 윤두서의 화법을 잘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종이에 그린 수묵화로 27.5×21.2㎝ 크기다. 간송미술관 소장.


한국에서 여성의 삶은 지금도 힘들지만 조선후기에는 훨씬 고단했습니다. 엄격한 성리학의 틀로 여성의 삶을 옭매었고 가정경제까지 책임져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민 여성들은 끝도 없는 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여기에다 눈물 쏟게 하는 시집살이, 빨래, 바느질, 육아, 남편수발, 제사 준비까지 한시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들밥을 준비하는 것도 여성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먹을 것은 늘 부족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니 먹을거리가 부족한 보릿고개에 땅을 뚫고 올라오는 봄나물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나물을 캐던 중 잠시 허리를 펴 보지만 아직 더 캐야 할 봄나물만큼 어깨는 천근만근입니다. 힘들다고 호미를 놓을 수는 있었겠습니까. 주린 배를 움켜쥐고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 생각에 호미를 다잡았을 겁니다. 아낙이 캐는 것은 나물만이 아닙니다. 가족의 삶과 희망도 함께 캤습니다. 아무리 삶이 고단해도 내 아이들만은 지키겠다는 의지가 솟아오릅니다. 그런 모습을 윤씨 가문 화가들은 멀리서 지켜보고 마음에 담아 그렸습니다.

윤두서의 애민정신, 외증손자 정약용에 이어져

조선시대 호남 최고 금수저 집안 장손인 윤두서는 어릴 적부터 따뜻하고 아름다움 심성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노비의 자식이 무조건 노비가 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겼고, 꼬박꼬박 노비의 이름을 불러줬으며, 노비문서를 태워버리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받아오라는 빚 문서도 찢어버렸고 대규모 기근이 들자 가문의 나무를 땔감으로 바닷물을 이용한 소금을 생산해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가문의 정신은 직계자손뿐 아니라 외증손자인 정약용에게도 영향을 끼칩니다. 정약용의 애민정신은 이런 영향과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해월 최시형(1827∼1898)은 “밥 짓고 밥 먹는 일이 가장 으뜸가는 제사”라 했으며 민주화 운동가이자 생명운동가인 무위당 장일순(1928∼1994)은 ‘밥이 곧 하늘’이라 했습니다. 코로나19로 서민의 삶이 너무 힘겨워졌습니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정부에서 이러저러한 지원책을 마련하곤 있지만 그나마도 한쪽에서는 포퓰리즘이네 세금낭비네 하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서민의 삶이 다 무너진 다음 다시 회복시키려면 지금보다 몇 배의 비용이 발생한다는 지적을 먼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건강하게 잘 먹는 것만으로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그래서 밥이 하느님이고 부처님입니다. ‘나물 캐기’를 통해 고단했던 옛 시절을 생각하며, 코로나19가 만든 현대판 춘궁기를 슬기롭게 잘 이겨나가길 응원해봅니다.

※ 해남 윤씨

전라남도 해남군의 토착 성씨다. 강진에 거주하던 윤효정(1476∼1543)이 해남 정씨 집안의 사위가 돼 해남으로 이주하면서 정착했다. 이후 경연검토관과 춘추관기사관 등을 지낸 윤구(1495∼?), 경상도관찰사와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윤의중(1524∼1590), 경상도관찰사와 예조참판 등을 지낸 윤광계(1559∼?)를 비롯해, 윤선도(1587∼1671), 윤두서(1668∼1715) 등 걸출한 인물을 배출해 당시 해남 기반의 명문사족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연시조 ‘어부사시사’(1651)의 저자로, 시가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혔던 윤선도는 해남 윤씨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윤선도의 출현으로 크게 빛을 낸 가문은 윤선도의 증손인 윤두서에 이르러 다시 천재적인 예술혼을 꽃피우며 명성을 높인다. 당쟁으로 인한 시대풍파를 겪으며 일찌감치 벼슬길을 포기하고 화가로만 산 윤두서는 시·서·화 모두에 능했다. 자화상·풍속화·사생화는 물론, 남종화풍 산수화, 화론과 서법, 전각과 지도 등 다방면에 재능을 발휘했다. 작품에 농사나 실생활에 대한 관심을 많이 표현한 것은 윤선도 이후 집안의 자부심이 된 예술을 통해 현실참여 의지를 내보인 것으로 보인다. 뒤이어 아들 윤덕희(1685∼1766)와 손자 윤용(1708∼1740)까지 3대에 걸친 가문의 예술혼은 조선 문인화의 맥을 잇는 중추적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