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호의 그림&스토리]<24>이상과 현실 사이 일그러진 초상

by오현주 기자
2021.07.23 03:30:00

▲구본웅 그림으로 본 시대유감
구본웅이 절친 이상에게 선물한 '친구의 초상'
여체보다 심리묘사 집중해 그린 누드화 '여인'
어두운 색조, 거친 붓터치, 강렬한 표현 통해
당시 지식인들 의식에 깃든 분노와 갈망 표현

구본웅이 1935년에 그린 ‘친구의 초상’. 절친한 친구였던 시인 이상의 내면을 절묘하게 잡아낸 작가의 대표작이다. 강렬한 색채 대비, 빠르고 격렬한 붓질, 분방한 필치의 굵은 선, 대담한 생략과 볼륨을 채운 면 처리 등으로 이상의 반항적이고 괴팍스러운 성품을 잘 표현했다. 이상은 자신이 종로에 연 ‘제비다방’에 작품을 늘 걸어뒀다고 한다. 캔버스에 유채, 62×5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예술의 역할은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난해와 올해에는 정말 좋은 전시가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중 특히 한국 근대미술을 조명한 전시가 눈길을 끕니다. 그런데 한국 근대미술 전시를 찾아다니다 보면 기획이나 내용은 다른데도 늘 빠지지 않고 걸리는 단골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만큼 그 작품이 가지는 의미와 상징성이 높기 때문이겠지요. 화가 구본웅(1906∼1953)의 ‘친구의 초상’(1935)이

화면은 짙은 푸른색조가 깔린 우울한 분위기입니다. 비껴 쓴 베레모 아래로 보이는 얼굴에는 수염이 가득한데, 좌우의 균형이 맞지 않아 왼편이 위로 치켜올라가 있습니다. 눈매는 도발적이고 눈밑은 붉어 마치 충혈된 것처럼 보입니다. 꿈틀거리는 듯한 진한 눈썹은 왠지 불만족스럽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표정을 만들었습니다. 붉은 입술로는 백색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습니다. 과연 이 얼굴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바로 연작시 ‘오감도’와 소설 ‘날개’ 등을 쓴 일제강점기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1910∼1937)입니다.

‘친구의 초상’ 속 담배 파이프에 자신 투영

본명이 김해경인 이상은 서울 출생으로 문단 활동은 1930년 잡지에 장편소설을 연재하면서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볼 수 없던 난해하고 비극적인 자의식을 작품에 선보여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구본웅과는 서울 신명보통학교 동기 동창인데, 구본웅이 이상보다 네 살이나 많지만 어릴 적 가정부의 실수로 낙상해 척추장애인이 된 뒤 몸도 약해 제대로 승급을 못하면서 같은 반이 됐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구본웅을 ‘꼽추’라고 놀렸지만 이상만은 존댓말을 쓰며 그를 존중했기에 둘도 없는 벗으로 발전했습니다. 구본웅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해인 1935년, 이미 폐결핵 3기로 진행한 이상을 구본웅은 캠퍼스 앞에 앉히고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림 속 이상의 붉은 입술은 어쩌면 각혈을 하던 핏빛 입술을 묘사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친구의 초상’은 ‘반역’ ‘부정’ 등의 파격적인 문학을 추구한 이상의 자학적인 고뇌와 식민지 상황 속 불안감에 육체마저 무너져가는 이상의 모습을 어두운 배경과 격렬한 터치로 표현해낸 수작입니다. 그러나 그림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물고 있는 파이프 담배입니다. 이상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파이프를 즐긴 이는 오히려 구본웅 자신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친구의 초상’은 이상의 초상화지만 장애로 인해 상처 입은 어두운 내면과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분노가 담긴 구본웅 자신을 그린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항상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이상의 제안을 거부하던 구본웅이 갑자기 먼저 이상에게 제안해 그린 작품이란 점도 그런 의심을 뒷받침합니다.

이상은 시인이자 소설가였지만 한때 화가가 꿈이었는데, 가정형편상 건축기술자란 직업을 갖게 됐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림에 대한 로망이 있던 그에게 구본웅은 화구상자를 선물했고 그것을 계기로 이상의 미술공부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자화상’을 출품해 입선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둘은 서로를 의지하면서도 예술적으로는 자극을 주고받는 진정한 벗이었던 겁니다. 이상과 구본웅의 외모에는 큰 차이가 있었는데 꼽추에 작은 키로 땅에 질질 끌리는 외투를 입고 다녔던 구본웅에 비해 이상은 하얀 얼굴에 털북숭이로 키가 컸으며 겨울에도 흰 구두를 신고 다니는 멋쟁이였습니다. 그래서 둘이 함께 거리를 거닐 때에는 아이들이 곡마단이 온 줄 알고 뒤를 따랐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상은 이 그림이 마음에 들었던지 그가 운영하던 다방 ‘제비’에 늘 걸어뒀다고 합니다.

이상과 구본웅의 인연은 문인과 화가의 인연으로도 의미가 크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인연이 있는데, 인척관계가 된 일입니다. 구본웅은 어릴 적 생모가 돌아가시고 의붓어머니 변동숙의 손에서 자랐는데 변동숙의 스물여섯 살 어린 동생 변동림이 이상과 살림을 꾸리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이상이 폐결핵을 앓고 있어 주위 사람들은 모두 말렸지만 변동림은 결혼을 강행했습니다. 그후 3개월쯤 지나 이상은 요양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일본경찰에 불령선인(일제강점기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사람을 이르던 말)으로 붙잡혀 34일간 구금을 당하면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고 결국 변동림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습니다. 깊은 사랑에 비해 너무나 짧은 만남이었습니다.



야수파 풍으로 격렬하게 그린 누드화 ‘여인’

구본웅은 개성을 중시한 전위적 모더니즘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야수파 계열의 화풍을 구사해 한국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 인정을 받았는데, 그 같은 세간의 평가와 인정에 큰 기여를 한 작품이 바로 ‘친구의 초상’이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작품이 있습니다. ‘여인’(1930s)입니다.

구본웅의 누드화 ‘여인’(1930s). 일그러진 얼굴의 여인이 머리 뒤로 손을 넘겨 깍지를 낀 듯한 도발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원색의 대비, 강렬한 표현 등 당시 그려진 고전적 누드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파격적 역동성이 도드라진 작품이다. 캔버스에 유채, 50×3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여인’은 서양화에서 흔하게 다루는 여성누드화입니다. 서양화가에게 여성의 인체는 신비와 탐구의 대상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그려져 왔습니다. 한국에서도 일본으로 유학을 간 김관호(1880∼1959)가 최초의 여성누드화인 ‘해질녘’(1916)을 그린 이후 서양화가라면 반드시 도전해볼 만한 장르가 됐습니다. ‘해질녁’이 해지는 물가에서 목욕하는 여인들의 뒷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던 데 비해 1920년대부터는 이제창(1896∼1954)의 ‘여’ 등 정면을 묘사한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1930년대 그린 구본웅의 ‘여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 한층 성숙된 여성누드화의 탄생을 알리는 작품입니다. 서양의 누드화가 보통 아름다운 여체를 표현한 데 그친 반면 구본웅의 ‘여인’은 아름다움을 향한 의지보단 격렬한 표현 그 자체를 위한 것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림 속 여인의 얼굴은 흔치 않은 적색과 녹색 등을 사용했는데, 선정적이면서도 변화무쌍한 여성의 복잡한 심리를 표현하기 위한 색감으로 이해가 됩니다. 원색조의 대담한 색채 운용, 일그러진 얼굴,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노출된 가슴을 더욱 적나라하게 부각한 당당한 포즈, 검고 강한 윤곽선, 거친 붓터치 등 구본웅이 심취했던 야수파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힘든 시기 서로를 지탱한 화가와 문인

구본웅은 이상이 사망한 이후에도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미술잡지를 발간하고 미술비평에도 열의를 보였습니다. 다만 일제강점 말기에 친일을 옹호하는 여러 편의 글을 썼고 해방 후 공개사과를 하기도 했습니다. 1953년 그 역시 폐병으로 숨을 거뒀는데 고작 47세였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무색하게 늘 함께하던 두 천재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과 ‘여인’은 한국 표현주의 미술의 시작을 알렸지만 무엇보다 당시 지식인들의 부정적인 자의식, 현실과의 부조화로 인한 반항적 심리를 잘 묘사했다고 할 겁니다. 도달하고 싶지만 도달하지 못하는,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욕망을 투영한 작품들입니다. 화가와 문인, 장르에 상관없이 서로에게 자극이 되고 힘이 됐던 예술가들의 연대를 잘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국 근대미술은 전통문화가 붕괴되는 고통을 예술적 연대로 버티며 새로운 길을 모색해나갔던 것입니다.

※ 야수파와 한국미술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일기 시작한 미술운동인 ‘야수파’는 강렬한 원색과 거친 붓질이 특징이다. 앙리 마티스, 모리스 드 블라맹크 등이 주도했고 조르주 쇠라, 폴 시냐크,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폴 세잔 등이 영향을 받았다. 한국 미술계에서는 표현주의 경향을 통칭해 야수파로 불렀다. 대표화가로는 구본웅이 꼽힌다. 일본 야수파의 중심그룹이던 ‘이과전’에 작품을 출품하며 구본웅은 대담한 색채대비, 평면적 색채구성, 형태의 왜곡 등과 같은 야수파의 특징을 경험하고 작품에 반영했다. ‘친구의 초상’(1935)은 블라맹크의 ‘파이프를 문 남자’(1900∼1901)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이고 ‘여인’(1930s)도 마티스나 독일 표현주의 회화에 보이는 경향이 도드라진다. 또 다른 표현주의 화가인 김주경(1902∼1981)이 그린 ‘가을볕’(1937)에서도 마티스의 ‘풍경화’(1905)가 오버랩된다. 한국에서 야수파는 일부 작가들에 의한 시도로 그쳤고 주류로 성장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