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으로 흥하고 총으로 사망한 독재자[그해 오늘]

by전재욱 기자
2022.10.20 00:03:00

2011년 10월20일 리비아 42년 독재자 카다피 사망
아랍의봄 여파로 도망 다니다가 시민군에 잡혀 총살
리비아 정치적 혼란 지속…튀니지, 이집트는 독재로 회귀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리비아 독재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는 1969년 9월 정권을 잡았다. 당시 군인이던 카다피가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했다. 계급이 대위에 불과했다. 집권하자마자 이스라엘 강경론과 석유 국유화를 동시에 폈다. 민심을 잡기 위한 행보였다.

무아마르 알 카다피.(사진=CNBC)
당시 리비아는 3차 중동전쟁(1967년)을 일으킨 이스라엘에 참패해 정권에 대한 국민 신뢰가 바닥을 쳤다. 그러자 카다피는 이스라엘과 분쟁을 겪는 팔레스타인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지원은 석유 수익에서 조달했다. 그때만 해도 리비아 석유 개발은 외국 석유 메이저가 맡았다. 석유 수익은 석유 메이저와 리비아 왕실에 돌아갔다. 카다피는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고 석유 메이저를 퇴출했다. 여기서 발생한 수익으로 팔레스타인을 도운 것이다. 아울러 인프라를 닦고 복지 수준을 끌어올렸다. 반 이스라엘과 석유 쇄국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카다피가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거름이 됐다.

이로써 서방, 미국과 관계는 자연히 경색했다. 외부 자본이 리비아 석유에 접근이 봉쇄된 데 따른 여파가 첫째였고, 이스라엘과 친교를 맺은 이들이 팔레스타인을 돕는 리비아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카다피는 아랍 우선주의자여서 애초부터 궁합이 맞질 않았다. 청년 장교 시절 영국 군사학교에서 연수했는데, 런던은 한사코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슬람 신자로서 ‘대영제국’ 수도를 방문하는 데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서방과 관계가 파국을 맞은 것은 1988년 12월 발생한 ‘로커비 사건’이었다. 영국 스코틀랜드 로커비 공항에서 이륙한 미국 팬암 여객기가 폭발했다. 이로써 탑승객 270명이 희생됐는데 개중에 189명이 미국인이었다. 배후는 리비아로 밝혀졌다. 이로써 리비아는 유엔 제재를 받고 국제사회에서 고립됐다.



소련이 붕괴하고 저유가가 지속하면서 카다피도 백기를 들었다. 2000년대 들어 반미 정책을 접고 대량살상무기도 자진 폐기했다. 미국의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도 빠지려고 테러 단체와 자발적으로 관계를 끊기도 했다. 시들한 경제를 살리려고 한 조처였는데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2011년 1월 국경을 맞댄 튀니지에서 ‘아랍의 봄’이 시작했다. 벤 알리 튀니지 대통령과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각각 물러났다. 수십 년간 독재를 해오던 인물들이었다. 민주화 물결은 리비아로 향했다. 리비아 국민은 42년째 독재하고 있는 카다피의 퇴장을 요구했다. 리비아의 열악한 경제적 상황, 정권의 부정부패, 카다피 아들의 권력 세습 움직임 등으로 민심이 등을 돌린 것이다.

카다피는 무력으로 국민을 제압했다. 리비아는 내전 상태로 빠졌다. 나토군이 리비아 시민군을 도와 참전했다. 전세가 역전하자 카다피는 수도 트로폴리를 떠나 도망갔다. 좁혀드는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결국 시민군에 체포됐다. 하수구를 기어서 도망가던 상태였다. 이후 시민군에게 모진 구타를 당하고 결국 총살돼 생을 마감했다. 2011년 10월20일 일이었다.

카다피가 1982년 10월 평양에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손을 잡은 모습.(사진=노동신문)
카다피가 물러난 리비아는 혼돈에 빠져들었다. 서부 트리폴리에 기반을 둔 이슬람계와 동부 투브르크에 기반을 둔 비 이슬람계가 정통을 주장하며 따로 정부를 세웠다. 중앙 정부가 없는 리비아를 지배하는 것은 무장세력이었다. 카다피의 후계자로 지목된 차남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가 202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당시 대선에 98명이 입후보할 만큼 정치적인 혼란이 지속했다. 결국, 대선은 무산되고 현재 리비아는 통합정부 없이 임시정부로 운영되고 있다.

다른 아랍은 어떠한가. 이집트는 무바라크 이후 정권을 잡은 엘시시 대통령이 9년째 독재를 이어가고 있다. 아랍의 봄 발원지 튀니지도 마찬가지다. 올해 7월 튀니지 국민은 투표를 거쳐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개정 헌법에는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에게 행정·입법·사법의 권한을 전부 인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독재로 회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