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판'도 흔한 풍경…177억원어치 팔아치운 화랑미술제[아트&머니]

by오현주 기자
2022.03.21 00:01:01

40년래 최고 흥행…5만3천명 찾아
젊은 초보컬렉터들 대거 몰리면서
대작가보다 중견·신진작가들 선전
중저가 작품에서 '완판' 많이 나와
'미술투자' 대한 문턱 낮아진 성과
일부화랑 과도한 판매행위는 '눈살'

서울 강남구 남부순환로 서울무역전시컨벤션센터(세텍·SETEC)에서 연 ‘2022 화랑미술제’ 전경. 갤러리나우 부스에 걸린 작가 고상우·이정록·김대섭 등의 작품들을 관람객들이 살펴보고 있다. 50여점을 들고나온 갤러리나우는 출품작보다 많은 70여점을 판매하기도 했다. 지난해 ‘미술품 투자열기’를 그대로 이어간 올해 화랑미술제에선 ‘완판’을 기록한 작가가 차고 넘쳐 화젯거리도 되지 못할 정도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레고마을이 있다고 한다. 러시아 침공으로 마을이 심하게 부서졌다는데. 블록장난감 ‘레고’를 모티프로 작업하는 작가 젠 박이 안타까운 마음에 ‘우크라이나를 위한 기도’(2021·73×62㎝)를 출품했고, 작품 판매액을 우크라이나 지원에 보태겠다는 뜻을 밝혔다. 사연을 들은 한 관람객이 망설임 없이 작품을 구매했다”(‘2022 화랑미술제’ 공근혜갤러리 부스).

#2. “아트페어에서 소개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작가들이 집중조명을 받았다. 그간 한정된 관람객을 대상으로 한 개인전보다 대중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작품을 내보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예상보다 많은 관람객이 관심을 가져주고 또 실제로 구매까지 이어지는 큰 성과를 냈다”(‘2022 화랑미술제’ 갤러리나우·선화랑 부스 등).

#3. “난생 처음 아트페어라는 데 와 봤다. 최근 말로만 듣던 미술시장이 얼마나 뜨거운지를 알게 됐다. 아쉬운 건 갤러리들의 대목이라선지 초보컬렉터인 내 눈에도 몇몇 갤러리는 진짜 장사꾼처럼 보였다는 거다. 차근차근 설명을 듣고 작품에 공감하는 분위기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름만 듣던 유명작가에게 몰리는 현상도 두드러져 보였고.”(‘2022 화랑미술제’에서 만난 한 관람객).

‘2022 화랑미술제’ 전경. 관람객들이 143개 부스를 돌며 작품을 돌아보느라 여념이 없다. 16∼20일 닷새동안 5만 3000여명의 관람객이 찾아 177억원어치 미술품을 사들이며 올해 화랑미술제는 첫 시작 이후 40년래 최고 매출을 기록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미술품을 팔고 사는 가장 대중적인 장’인 아트페어. 국내서 가장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화랑미술제가 40회째로 연 ‘2022 화랑미술제’가 20일 폐막했다. 143개 화랑·갤러리가 800여명 작가들의 작품 4000여점을 내놓고, ‘역대급 규모’를 내걸었던 올해의 일정을 마무리한 거다. 서울 강남구 남부순환로 서울무역전시컨벤션센터(세텍·SETEC)에서 닷새간 연 미술장터에서 기록한 미술품 판매액은 약 177억원. 5만 3000여명이 찾아 40년 역사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냈다.

이제껏 화랑미술제가 쓴 최고기록은 4만 8000여명이 다녀간, 지난해 거둔 매출 72억원이다. 결국 이 스타트가 한 해 내내 이어지며 미술시장, 특히 아트페어 활황에 도화선이 됐더랬다. 지난 5월 ‘아트부산’에서도 역대급(약 350억원어치 판매), 10월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키아프)에서도 역대급(약 650억원어치 판매)이란 말을 끄집어냈다.

‘2022 화랑미술제’ 전경. 오른쪽으로 공근혜갤러리 부스에 걸린 작가 젠 박의 작품들이 보인다. 젊은 초보컬렉터들이 대거 몰린 올해 화랑미술제에선 100만∼1000만원대 중저가작품들의 완판율이 높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완판’ 그 이상…“안 팔리는 작품이 되레 이상할 정도”

미술시장에서 작품이 싹 팔린다는 ‘완판’(sold out)은 드문 일이다. 완판한 작가는 작가대로, 완판한 갤러리는 갤러리대로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거는 족족 앞다퉈 떼어간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이번 화랑미술제에서 완판은 그다지 드문 일도, 부러운 일도 못 됐다. 작가별로 고르게 완판을 알린 갤러리들이 속출해서다.

이번 완판 기록은 가격이 높은 대작가들의 고가작품보다 중견·신진작가의 중저가작품에서 많이 나왔다. 억대보다 100만∼1000만원대 작품에 ‘젊은’ 초보컬렉터가 대거 몰렸다는 뜻이다. 한 갤러리 관계자는 “MZ세대라 불리는 층이 확실히 늘어났다”며 “원체 완판이 많아 안 팔리는 작품이 생기면 오히려 더 이상할 정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2022 화랑미술제’ 전경. 가나아트 부스에 관람객들이 북적이고 있다. 왼쪽부터 작가 문형태, 김구림, 심문섭의 작품들이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가나아트는 심문섭·김구림·최울가·문형태 등 유명작가의 소품으로 일찌감치 완판을 신고했다. 홍보담당자는 “원체 인기작가들이라 밀린 작업이 많아 추가 주문도 받기가 어렵다”며 “팔린 것을 내리고 바꿔 걸 작품도 없어 이번에는 전시하는 데 만족해야 할 형편”이라고 했다.

선화랑은 중견작가들의 20여점을 모두 완판시켰다. ‘집’을 그리는 작가 김명식, ‘진달래화가’ 김정수 등의 작은 그림들이 빠르게 팔려나갔다. 이외에도 새들로 인간세상을 위로하는 그림을 그려온 이영지의 ‘찰나가 영원이 될 때’(20호·2021) 등 7점, 향불을 피워 순지에 작은 구멍을 내 그림을 그리는 ‘향불화가’ 이길우의 ‘보정동 항아리’(30호 2022) 등 4점이 다 팔렸다. 원혜경 대표는 “특히 이길우 작가는 아트페어에는 잘 나서질 않았던 터라 판매 이상으로 작가를 알리는 성과를 거뒀다”고 말했다.

‘2022 화랑미술제’ 전경. 왼쪽으로 선화랑 부스에 걸린 작가 이영지의 작품들이 보인다. 일찌감치 완판을 신고하며 모두 빨간딱지를 붙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갤러리나우에선 ‘완판 이상’의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출력한 사진에 드로잉을 올리는 기법으로 유명한 작가 고상우의 ‘공존하다’(2022), 촘촘하게 박아낸 인물군상으로 ‘관계’를 생각케 하는 김소형의 소품 ‘피플’(2022) 등에 ‘빨간닥지’가 2∼6개씩 붙은 건데. 이순심 대표는 “에디션이 있는 고상우의 작품은 출품작보다 더 판매됐고 김소형의 작품은 같은 크기로 추가 주문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50여점을 들고나온 갤러리나우는 출품작보다도 많은 70여점을 판매하는 결과를 내기도 했다.

‘그림 반 사람 반’…미술시장 장벽 좀더 허문 건 성과

지난해 미술시장의 열기를 고스란히 이어낸 ‘2022 화랑미술제’에선 미술품 팔고 사는 일이 한결 수월해진 듯했다. 작가는 작가대로, 갤러리는 갤러리대로, 또 관람객은 관람객대로 각각의 ‘부담감’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뜻이다. 거장이라 불리는 대형작가들의 그늘에 가려 있던 중견작가들은 억눌렸던 기량을 한껏 발산했고, ‘얼굴마담’에선 내내 밀렸던 젊은 작가들도 앞다퉈 작품을 팔았다. 갤러리들은 그런 작가들을 소개하는 일에 발도 입도 바빠졌다.

‘2022 화랑미술제’ 전경. 국제갤러리 부스에 건 박서보의 ‘묘법 no.180428’(2018) 앞에서 한 관람객과 갤러리 관계자가 작품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렇다면 관람객은? 북적거리는 인파로 ‘그림 반 사람 반’의 풍경에 일조했다. 다닥다닥 붙은 화랑 부스들에서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드나들다가 그림보다 사람구경을 더했다 싶기도 했을 거다. 전혀 ‘예술적’이지 않은 몇몇 화랑의 판매열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만난 관람객들은 “문턱이 많이 낮아졌다”고 입을 모은다. 그 말대로 올해 첫 아트페어의 분위기는 한층 ‘스스럼없어졌다’로 그려진다.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라고 여겼던 미술시장, 미술투자의 장벽을 좀더 허물었다는 방증일 텐데. 사실 ‘역대급 매출’보다 더 중요한 점은 여기에 있다. 소장이 목적이든 투자가 목적이든 미술품을 향한 대중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는 소리니까.
서울 강남구 남부순환로 서울무역전시컨벤션센터(세텍·SETEC)에서 연 ‘2022 화랑미술제’ 전경. 관람객들이 이화익갤러리 부스에 건 작가 차영석의 운동화 그림들을 관심있게 들여다보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화랑미술제가 삼성동 코엑스에서 장소를 옮겨 세텍에서 연 건 이번이 처음. 특징이라면 갤러리마다 ‘균일한 부스 크기’에 있었다. 가을에 여는 키아프가 갤러리 재량껏 부스 크기를 선택하고 화려하게 디스플레이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풍경이 나왔다는 뜻이다. 동일한 조건에서 작품에만 충실하게 한 배경이 오히려 중소 갤러리에 유리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2022 화랑미술제’ 전경. 부모를 따라 갤러리나우 부스를 찾은 한 어린 소녀가 ‘작품촬영’에 여념이 없다. 16∼20일 닷새동안 5만 3000여명의 관람객이 찾아 177억원어치 미술품을 사들이며 올해 화랑미술제는 첫 시작 이후 40년래 최고 매출을 기록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