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완성된 띠동갑 파워' 신유빈-전지희, 한국 탁구 희망으로 우뚝

by이석무 기자
2023.05.28 19:35:45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2023 국제탁구연맹(ITTF) 개인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복식에서 값진 은메달을 따낸 신유빈(왼쪽)과 전지희. 사진=대한탁구협회 제공
[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신유빈(18·대한항공)과 전지희(30·미래에셋증권)가 한국 탁구에 희망의 빛을 선물했다. 중국 천하의 세계 탁구에서 한국도 다시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었다.

신유빈-전지희 조는 27일(현지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2023 국제탁구연맹(ITTF) 개인전 세계선수권대회 여자복식 결승에서 중국의 왕이디-천멍 조(7위)에 0-3(8-11 7-11 10-12)으로 패했다.

결승전 결과는 아쉬웠지만 신유빈-전지희 조는 한국 탁구에 새 역사를 썼다. 한국 탁구가 세계선수권대회 여자복식 결승에 오른 것은 1987년 뉴델리 대회에서 우승한 양영자-현정화 조 이후 36년 만이다. 여자 개인전 단·복식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한국 선수가 은메달 이상 성적을 낸 것은 1993년 예테보리 대회 여자단식 금메달을 차지했던 현정화 이후 처음이었다.

여자복식 신유빈-전지희 조 외에도 한국 탁구는 큰 성과를 이뤘다. 남자복식에서 장우진(미래에셋증권)-임종훈(한국거래소) 조가 은메달을, 조대성-임상수(이상 삼성생명) 조가 동메달을 따냈다.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 등 총 3개 메달을 획득했다. 한국 탁구가 개인전 세계선수권에서 메달 3개 이상을 따낸 것은 2003년 파리 대회(남자단식 은메달, 남자 복식 동메달, 여자복식 동메달) 이후 20년 만이었다.

신유빈-전지희 조의 은메달은 힘든 시기와 고난을 이겨낸 끝에 이뤘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컸다. 어릴 적부터 ‘탁구 신동’으로 주목받은 신유빈은 2021년 도쿄올림픽을 통해 한국 탁구를 이끌어갈 새로운 에이스로 기대를 모았다.

그의 발목을 잡은 건 부상이었다. 그해 11월 열린 개인전 세계선수권에서 손목 피로골절 부상으로 중도 기권했다. 이후에도 경기와 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지난해 초에는 손목뼈에 핀을 박는 수술을 받았다. 국제대회에 나가고 통증이 재발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지난해 9월 말 추가로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다.

계속된 부상과 수술에도 신유빈은 좌절하지 않았다. 탁구 라켓을 잡지 못할 때도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파워와 체력을 키운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신유빈은 이번 대회에서 상대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안정된 수비력을 뽐냈다. 체력이 뒷받침되다 보니 집중력이 흔들리지 않았다. 파워도 업그레이드되면서 상대 스매싱에 오히려 맞불을 놓을 수 있었다. 샷이 그전보다 훨씬 묵직해지면서 공격하던 상대가 밀리는 모습까지 나왔다.

이번 대회를 통해 신유빈은 유망주를 넘어 세계 정상급 선수로 우뚝 섰다. 파트너인 전지희도 “신유빈은 그간 대표팀에 없던 ‘올라운더’다”며 “여자 대표팀이 유빈이가 합류한 이후로 크게 좋아진 걸 크게 느낀다. 한국 여자탁구의 다른 길을 새로 만드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전지희의 도전은 더 드라마틱하다. 전지희는 중국에서 귀화한 선수다. 원래 이름은 톈민웨이였고 고향은 중국 허베이성 랑팡시다. 주니어 국가대표까지 지낼 정도로 실력이 높았지만 중국에서 성인 국가대표가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고민 끝에 2008년 한국에 왔고 2011년 한국 국적을 취득해 ‘한국인 전지희’가 됐다.

곧바로 한국을 대표하는 여자 탁구선수가 된 전지희는 국제대회에 나오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귀화 선수는 7년 동안 세계선수권 출전을 금지한다’는 국제탁구연맹(ITTF) 규정 때문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국제무대에 모습을 드러냈고 세계적인 강자로 인정받은 전지희는 징크스는 있었다. 유독 세계선수권대회나 올림픽 등 큰 대회와는 인연이 없었다는 점이다. 2018년 단체전 세계선수권에서 동메달을 따낸 것이 전부였다. 자기보다 뒤처지는 중화권 선수들이 시상대에 오르는 보면서 마음고생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에는 무릎 부상 때문에 힘든 시기를 겪었다. 30대에 접어들면서 탁구계 내부에선 ‘전지희 대신 어린 선수들에게 국제대회 참가 기회를 줘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포기를 모르는 전지희는 기어코 탁구인생에 꽃을 피웠다. 부상을 털고 강도높은 훈련을 소화하면서 한창때 보여줬던 강력한 공격력이 되살아났다. 파트너인 신유빈조차 “언니 경기를 ‘야~ 와~ 오~’ 감탄하면서 봤다”며 “지희 언니가 있으니까 더 편하게 할 수 있었다”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2019년부터 함께 복식으로 호흡을 맞춘 신유빈과 전지희의 단단한 믿음은 이번 은메달의 좋은 밑거름이 됐다. 12살 띠동갑인 둘은 단식에서는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지만 복식에선 둘도 없는 파트너다.

신유빈과 전지희는 스타일이 다르다. 신유빈이 탄탄한 수비력이 돋보이는 올라운드 플레이어. 전지희는 한 박자 빠른 스매싱이 일품인 전형적인 공격수다. 전지희는 왼손잡이고 신유빈은 오른손잡이다.

둘의 조합은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각자 강점을 살리면서 부족한 부분은 보완해 줬다. 기술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면서 팀으로서 더 강력해졌다.

인터뷰에서도 둘의 돈독한 믿음은 그대로 나타난다. 메이저 대회 부진 징크스를 털어낸 전지희는 “유빈이가 클 때까지 기다리길 잘한 것 같다”며 “잘 커 준 유빈이 덕에 이 자리에 올라왔다”고 신유빈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아직 10대 소녀인 신유빈은 전지희가 더 의지가 된다. 그는 “부상도 있고 여러모로 쉽지 않았는데, 지희 언니가 있으니까 더 편하게 할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신유빈과 전지희는 이번 세계선수권대회 은메달을 통해 내년으로 다가온 파리 올림픽에 대한 기대감도 높였다. 올림픽 탁구에는 남녀 복식 종목은 없다. 대신 남녀 단체전에 복식이 들어간다. 특히 여자복식은 단체전 1경기라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국은 역대 올림픽 탁구에서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메달리스트를 배출했다. 최근에는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이어 도쿄올림픽까지 2개 대회 연속 노메달에 그쳤다. 신유빈-전지희는 한국 탁구를 수렁에서 구할 희망이다. 지금 실력을 이어가고 부상 관리를 잘한다면 파리 올림픽에서 한국 탁구의 부활을 이끌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