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 개척자' 강정호, 14년 전 이치로의 '깡'이 필요하다

by정재호 기자
2015.01.13 16:23:08

[이데일리 e뉴스 정재호 기자] 이치로 스즈키(41)가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던 2001시즌 전 미국 현지의 많은 전문가들은 성공 가능성에 의문을 표했다.

돌이켜보면 이치로가 사실상의 개척자여서 그랬던 측면이 컸다. 항상 개척자는 많은 물음표를 안고 가게 마련이다. 일본프로야구 출신의 수퍼스타 야수가 과연 메이저리그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지 이치로 전에는 이렇다 할 선례를 찾기 힘들었다.

단순히 전례나 선례 차원만은 아니었다. 스카우트들의 눈에 비친 이치로는 몇 가지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크게 3가지로 첫째 미국야구가 중시하는 피지컬(신체·운동능력)이 많이 모자랐다.

심지어 체력소모가 혹독하기로 소문난 메이저리그에서 한 시즌 160경기를 뛸 체력이 버텨줄 수 있을지조차 장담하지 못한다는 혹평이 나왔다.

또 하나 그 당시 이치로에게는 일본야구를 평정한 원동력으로 꼽히던 이른바 ‘시계추 타법’ 논란이 거셌다. 앞 발(오른발)을 안쪽으로 당겼다가 치는 순간 투수 쪽으로 뻗는 일본식의 아주 독특한 타격이 거구의 서양인들이 뿌려대는 150km가 훌쩍 넘는 강속구를 견뎌낼지 모를 일이었다.

이치로 스즈키가 공을 친 뒤 방망이를 놓으며 1루 쪽으로 뛰어가고 있다. 사진=Gettyimages/멀티비츠
특유의 ‘똑딱이’ 타법 역시 힘을 강조하는 미국식 메이저리그 야구와 별로 궁합이 맞지 않는 듯 보였다.

결국 모기업(일본 게임업체 닌텐도)의 영향이 있는 시애틀 매리너스의 마케팅용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흘러왔음에도 이치로는 이런 우려를 단방에 불식시켜버린다.

자존심이 강한 이치로는 반드시 실력으로 모든 걸 보여주겠노라고 이를 악물었다. 그 결과 데뷔 첫해 ‘157경기 738타석 692타수 242안타 타율 0.350 8홈런 69타점 127득점 56도루 OPS(출루율+장타율) 0.838’ 등의 엄청난 성적을 남겼다.

‘올스타-최우수선수(MVP)-신인왕-타격왕(타율)-골드글러브-실버슬러거’ 등 주요 6관왕을 휩쓸었다.

피부로 직접 느낀 강속구에 대응하고자 시계추 타법을 과감히 버린 것이 주효했고 체력 논란은 그해 ‘최다타석-최다타수-최다안타-수위타자-도루’ 부문 리그 1위에 오르는 것으로 말끔히 해소했다.

‘똑딱이’ 타자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지만 장점을 극대화하는 그만의 독특한 생존법으로 롱런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치로는 이후 14년간 빅리그에 몸담으며 ‘2204경기 2844안타 0.317 112홈런 717타점 1303득점 487도루 OPS 0.771’ 등의 위대한 금자탑을 쌓고 있다.

13일(한국시간) 강정호(27·넥센 히어로즈)가 자신을 500만2015달러(약 55억원)로 포스팅(입찰)한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4년 약 1600만달러 및 5년째 옵션 계약에 합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강정호 측에서 협상을 진행한 에이전트 앨런 네로는 닷새 전 피츠버그의 유력 일간지 ‘포스트-가젯’을 통해 이런 말을 했다.



앞서 “만약 강정호가 쿠바 출신이었다면 1억달러(약 1097억원)는 족히 받았을 것”이라는 말로 화제를 낳았던 네로는 “이치로가 처음 포스팅될 때만 해도 그의 기술이 어떻게 미국으로 옮겨올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팽배했다. 그런데 이치로는 2001년 메이저리그 데뷔시즌에 타격왕(0.350)과 MVP, 신인왕 등을 휩쓸었다”고 되짚었다.

그러면서 “강정호가 한국프로야구 출신의 첫 타자라는 점을 명심하라”며 “나는 그를 (이치로와 같이) 어떤 리그로부터 온 첫 번째 비범한 선수들과 감히 비교하려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정호의 ‘개척자’ 내지는 ‘선구자’적 역할에 대해 전날에는 ‘보스턴 글로브’를 통해 “한국프로야구 출신 야수가 없었을 뿐더러 3할에 40홈런을 때린 내야수를 비교할 대상 자체가 없어 강정호의 가치를 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과거 일본의 이치로처럼 ‘처음’이라는 수식어를 달게 된 강정호의 가치 정립이 쉽지 않아 협상과정이 조금 길어졌으나 포스팅 금액 500만달러에 연봉 400만달러 수준이면 꽤 괜찮은 계약을 이끌어낸 격이다.

그런 뜻에서 강정호의 가장 좋은 선례이자 롤모델은 이치로가 될 수 있다. 바야흐로 메이저리그로 직행하는 사상 첫 한국프로야구 출신 야수가 되는 강정호에게도 이치로와 비슷한 의혹들이 뒤따르고 있어서다.

강정호는 14년 전 이치로의 ‘시계추 타법’과 비슷하게 ‘레그킥(타격 시 다리 드는 동작)’을 비롯한 ‘홈런 뻥튀기 논란, 유격수 수비범위’ 등 크게 3가지 의혹에 직면해 있다.

레그킥 논란에 대해 네로는 “지난 3년간 강정호를 비디오로 연구해보면 그의 타격기술이 얼마나 엄청나게 수정돼왔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타격 스타일을 바꿔왔다. 전형적으로 끌어당겨 치는 파워히터가 아닌 타구를 필드 전체로 날릴 줄 안다”며 추후 빅리그에서도 레그킥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수정 가능한 부분이라는 점을 시사했다.

이를 적극 어필한 결과 똑똑하기로 소문난 닐 헌팅튼(45·파이어리츠) 단장의 동의를 얻어낸 것으로 보인다.

홈런숫자 뻥튀기 의혹은 한국의 ‘쿠어스 필드’로 불리는 ‘목동구장’에서 우타자들에게 매우 불리한 파이어리츠의 홈구장 ‘PNC 파크’로 옮기는 올해 차차 지켜볼 일이고 수비범위를 논할 때 등장하는 ‘너무 튼튼한 하체와 대시-다이빙 회피경향’ 등은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수비자세로 얼마든지 보완할 수 있는 지엽적인 부분이다.

투수 쪽에 류현진(27·LA다저스)과 노모 히데오(46)가 있었다면 타자 쪽에는 앞으로 강정호와 이치로로 역사는 대표될 것이다. 물론 강정호가 이치로 업적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걸 전제한다.

아직 검증된 적 없는 리그의 동양인 타자에게 ‘스몰마켓’ 구단이 총액 2000만달러 이상을 투자하는 건 보통 모험이 아니다. 오랜 검증작업 끝에 강정호의 기본 실력과 성공 가능성을 높게 점친 결과다.

꿈은 이루어졌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 14년 전 이치로가 이를 악물고 콧대 높던 미국야구를 눌렀던 그 ‘깡’처럼 마침내 좋은 대우와 제대로 된 기회를 잡게 된 2015년의 강정호도 오롯이 실력으로 모든 의혹을 잠재우고 보란 듯이 한국야구의 빛나는 선구자로 거듭나길 팬들은 바라마지 않는다.

무엇보다 강정호에게는 14년 전 이치로의 ‘깡’이 필요하다. ‘깡’이라는 한 글자에는 ‘강한 자존심과 자신감, 악착같은 집념과 정신력·배짱’ 등이 한데 녹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