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 영화 ‘국제시장’서 실제 父와 호흡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 (인터뷰)

by박종민 기자
2013.12.09 15:27:31

△ 배우 이현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 사진= 이현 제공


[이데일리 e뉴스 박종민 기자] “한 배역을 실제 부자(父子)가 나눠 연기한 경우는 국내외를 따져도 드물지 않을까요?”

내년 7월 개봉하는 영화 ‘국제시장’의 주연 황정민의 동생 승규 역으로 캐스팅돼 스크린 데뷔를 앞둔 배우 이현(28)의 얼굴은 인터뷰 내내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8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현의 눈빛에는 연기에 대한 강한 열정이 엿보였다.

지난달 ‘국제시장’의 후반부 촬영을 마친 그는 여전히 촬영장을 찾는 착각을 한다고 한다. 첫 키스의 추억은 누구에게나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 만큼 초년 배우에게 생애 첫 상업영화 촬영은 의미가 남다른가 보다. 그가 전하는 솔직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흠뻑 빠져보자.

리딩 대본날 황정민 선배를 처음 마주했을 때 허벅지를 꼬집은 기억이 난다. 눈앞에 놓인 현실이 믿기지 않아서다. 흰 티셔츠에 선글라스를 낀 황정민 선배의 카리스마는 압권이었다. 벌떡 일어나서 선배에게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드렸는데 다정하게 받아 주셨다. 솔직히 지금도 영화 ‘국제시장’의 일원이 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2010년 2월 연출과를 졸업한 후 인천에서 연극생활을 시작했다. 6~7편의 연극에 출연하며 기본기를 쌓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 스크린 데뷔에 대한 갈망은 있었다. 지난해부터 영화사에 프로필을 직접 돌리며 오디션을 보다가 올해 4월 국제시장 오디션을 봤다.

1000명 정도 지원했다고 들었는데 소속사가 없었던 나로선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그런데 8월 어느 날 오후 6시쯤 영화사에서 연락이 왔다. 30분 후 연극무대에 올라야 해서 다음날 방문하겠다고 했지만 들려오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이현 씨 지금 안 오면 후회할 텐데”라는 실장님의 말씀에 당장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비가 모자랐지만 기사님께서 다행히 깎아주셨다. 영화사에서 ‘승규 역’이 적힌 흰 봉투를 건네받고 실장님께 몇 번이나 90도 인사를 했는지 모르겠다. 신사역을 거닐며 배우의 길을 완강히 반대하셨던 아버지의 모습과 배고팠던 연극시절이 생각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버지께 사실을 알렸더니 말을 잇지 못하셨다.

물론 어려움이 많았다. 한번은 오디션에서 건달 역이 주어져 “닌 또 누꼬?”라는 대사를 해야 했다. 내 성격과 너무 다른 연기를 하려니 무척 어색했다. 대사 첫 마디를 내뱉는 순간 집중하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 ‘변호인’, ‘특수본’ 등 오디션도 봤는데 번번이 낙방했다.

좌절감이 많이 들었지만 노력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연기 학원은 다니지 않았지만 연극을 하면서 선배들로부터 배운 기본기를 열심히 닦아 캐스팅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번에 함께 연기한 장영남 선배가 내 오디션 영상을 보고 “카메라가 뚫리는 줄 알았다”며 칭찬해 주셔서 기뻤다. 꾸준히 노력하다 보니 좋은 결과가 나왔던 것 같다.

국제시장은 6·25전쟁부터 현재까지 살아온 사람들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으로 감동이라는 요소가 들어가 있는 영화다. 현대사를 생생히 조명했기 때문에 요즘 젊은 친구들이 역사를 바로 아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지난 9월 3일 첫 촬영을 시작으로 두 달 동안 총 8일간 촬영했다. 그렇지만 촬영장 분위기에 익숙해지기 위해 촬영이 없는 날에도 현장을 찾으려고 애썼다. 부산 기장군 기장읍 서부리에서 이뤄진 촬영은 그날그날 다르긴 했지만 늦어도 밤 8시에는 끝났다.

솔직히 어려웠다. 촬영장 분위기에도 익숙지 않았고 행동과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에 많이 긴장했던 것 같다. 배우들이 앉는 의자에도 등을 붙이지 못한 채 불편하게 앉았던 기억이 난다. 선배님들이 말을 걸어와도 재미있게 답하지 못해 어색한 상황을 연출했다.

두 번째 날 첫 대사에서 NG를 8번이나 내 선배님한테 혼이 많이 났다. “어무이 3년만 일하면 돈 많이 벌 수 있다카이까네”라는 사투리 연기였는데 너무 긴장해 NG를 많이 냈다. 하지만 후반 촬영 때는 분위기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모든 선배들이 촬영장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셨다. 그러나 굳이 한 분을 꼽으라면 황정민 선배를 꼽고 싶다. 선배는 식사를 할 때도 휴식을 취할 때도 음악을 들으셨다. 덕분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음악을 들으며 기분이 좋아졌다. 연기만큼은 아니지만 음악을 무척 사랑하시는 것 같았다. 물론 농담도 잘하신다.(웃음)



△ 영화 ‘국제시장’으로 데뷔를 앞둔 배우 이현(왼쪽)은 인터뷰 내내 솔직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극 중 승규는 18세 청년에서 60대 노인으로 서서히 변한다. 18세 청년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한 달 간 7~8kg 정도 살을 뺐다. 30대 후반 승규 역을 소화하는 것까지는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50대나 60대의 승규를 연기하기에는 분장에도 한계가 있어 애를 먹었다.

어느 날 조감독님이 아버지의 사진을 요청해서 사진을 보여 드렸다. 그러자 조감독님은 아버지를 섭외해달라는 뜻밖의 주문을 하셨다. 배우가 되는 걸 극구 반대하셨던 아버지에게 연기를 부탁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연기를 우에하노(어떡해 하냐)”라고 사양하시던 아버지는 결국 아들의 간곡한 부탁에 이틀간 촬영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포항에서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셨다. 연기 경험은 당연히 없으시다. 아버지를 설득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걱정이 많이 됐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머리를 긁적이며)

아버지는 “그라고 행님은 이제 좀 쉬라. 가게는 큰 아한테 맡기고”라는 대사를 맡았는데 NG를 내지 않고 한 번에 감독님의 합격 사인을 받았다. 이에 한 선배는 “촬영장 분위기에 익숙지 않으셨을 텐데 적응이 굉장히 빠르신 것 같다. 대사도 자연스러우시다”며 혀를 내두르셨다. 역시 아버지를 따라가기에는 내가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첫 단독샷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단독샷을 촬영하려던 순간 윤제균 감독님께서 무전기로 “승규 첫 영화에 첫 단독샷이다”고 말씀하시며 현장에 있던 배우들을 불러 모았다. 리액션 샷이였는데 10여명의 선후배 배우들이 내 단독샷을 지켜보며 열렬히 응원해줬다. 무척이나 감동을 받았다.

그렇다. 국제시장은 상업영화 배우로서 나의 첫 출연작이다. 수없이 오디션에 떨어지며 자괴감에 빠져 있던 나에게 한 줄기 빛을 준 작품이어서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전환점을 마련해줬다고나 할까. 나에게 국제시장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행복’이었다.

배우를 꿈꾸면서 가졌던 습관이 있다. 특이한 상황이나 강한 느낌을 받았을 때 항상 거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얼굴을 쳐다보고 몸에 움직임을 관찰한다.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했다. 카페나 술집에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감정이입이 돼서 화가 날 때도 있었다.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이고 듣다 보면 저절로 감정이 생기더라.

한번은 일명 ‘싸이코’ 역을 멋지게 소화하려는 욕심에 수염을 기르고 씻지도 않은 채 커튼을 치고 2주 동안 집에만 있었다. 가수 포티쉐드의 ‘로드’(Roads) 같은 우울한 곡만 듣고 우울한 생각만 하니 미칠 것 같았다. 2주 후 밖에 나와 보니 친구가 “눈빛이 이상하다”며 놀라워했다. 연기는 그 배역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배역이 삶 자체가 되는 게 연기인 것 같다.

다양한 역할을 개성 있게 소화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지금까지 맡은 역할은 대부분 착하고 건실한 캐릭터였다. 망가지고 못생기고 더러워도 좋다. 어떤 역할을 맡든 최선을 다해 관객들이 믿고 보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다.

롤모델은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다. 그의 연기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리얼리티에 끝을 보여주는 배우가 아닌가 생각한다.

꾸준히 영화 오디션을 보고 있다. 촬영이 끝났다고 마냥 휴식을 취하기보단 또 다른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게 신인 배우의 자세인 것 같다. 내년 3~4월엔 새로운 작품을 만나 국제시장이 개봉할 때쯤 한창 연기에 매진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본다면 뿌듯할 것 같다.

촬영을 무사히 마쳐서 기쁘다. 촬영을 시작한 날 선배들을 따라 차를 타고 촬영장에 가며 “저 연예인 차 처음 타 봐요”라고 고백해 ‘촌놈’이라 불리던 기억이 난다.(웃음)

이 자리를 빌어 윤제균 감독님과 연기에 도움을 주신 많은 선배, 동료분들, 영화 제작에 힘써주신 스태프분들께 감사드리고 싶다. 이분들을 만난 건 큰 행운이었던 것 같다. 아직 여러모로 부족한 새내기 배우지만 앞으로 멋진 배우로 성장할 것을 모두에게 약속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