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 떠오르게 한 정현의 ‘뽀얀 발’

by조희찬 기자
2018.01.26 20:04:55

정현이 경기 도중 메디컬 타임아웃을 부른 후 의료진에게 치료를 받고 있는 모습(사진=AFPBBNews)
[이데일리 스타in 조희찬 기자] 26일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준결승이 열린 호주 멜버른 로드 레이버 아레나. 정현(58위·한국체대)은 로저 페더러(2위·스위스)와의 준결승 2세트 도중 메디컬 타임아웃을 불렀다. 정현이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왼발을 감싸고 있던 양말을 벗자 그 속에 감춰졌던 ‘뽀얀 발’이 밖으로 드러났다.

테니스에서 메디컬 타임아웃은 3분까지 주어진다. 하지만 정현의 왼발을 감싼 붕대가 워낙 두꺼워 제거하는 데 3분이 넘게 소요됐다. 붕대의 두께에서 그간 정현이 참고 견뎌온 고통의 두께가 느껴졌다. 중계를 맡은 해설자는 “정현의 물집이 꽤 심각했으나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내색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부상이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정현은 치료를 받고 다시 코트로 나섰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기권을 선언했다.

정현의 활약 속에 비인기종목이었던 테니스는 지난 2주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다. 팬들의 관심도 높아져 테니스를 ‘국민 스포츠’의 반열에 올려놨다. 그는 대회 16강전에서 전 세계랭킹 1위 노바크 조코비치(14위·세르비아)를 꺾고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그랜드슬램 8강 진출을 이루더니 8강전에선 이번 대회 ‘돌풍’을 일으킨 테니스 샌드그렌(97위·미국)마저 잡으며 ‘4강 기적’을 썼다.



정현의 맨발은 외환위기 시절인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맨발의 기적’을 만든 박세리(41)를 떠올리게 했다. 박세리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워터해저드(호수) 근처에 떨어진 공을 쳐내기 위해 양말을 벗고 호수 안으로 들어가 공을 쳐냈다. 화면으로 비친 박세리의 발은 유난히 뽀얗게 보였다. 검게 그을린 다리 아래로 경계가 선명한 하얀 발은 박세리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노력을 한눈에 보여줬다. 그날 박세리의 맨발 투혼은 국민들에게 희망과 감동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 뒤 수많은 ‘세리 키즈’를 배출했다. 비록 정현의 물집 투혼은 우승이라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희망과 감동의 드라마는 박세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현이 경기 도중 물집이 잡힌 왼발을 치료받고 있다.(사진=AFPBB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