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삼성 백지훈 "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
by이석무 기자
2016.04.19 09:50:20
[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예쁜 왕자에서 거친 머슴으로 변했다.
“슈팅보다 태클이 많다”는 평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강하게 상대를 다뤘고 더 거칠게 어깨싸움을 벌였다. 공격만 하면서 항상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버린 지 오래다.
5년간 이어진 큰 부상과 오랜 슬럼프를 딛고 다시 선 수원 삼성 미드필더 백지훈(31)은 “팀이 이길 수 있다면 나는 숨은 조연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베테랑이 됐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원정을 위해 일본을 찾은 백지훈은 과거 화려함만 좇은 어린 왕자가 아니었다. 그는 팀을 위해서 몸을 던지는 투사가 됐고 수비라인을 책임지는 머슴이 됐다. 외로운 시간 속에 아픔을 경험하면서 성숙해졌다.
10년전 백지훈은 정말 잘 나갔다. 올림픽대표팀, 국가대표팀, 프로축구에서 인기절정이었다. 놀라운 발재간, 깔끔한 볼처리, 두려움을 모르는 공격본능, 수려한 외모까지 모든 것을 갖췄다.최고 스타로 떠오른 그는 2006년 독일월드컵 무대를 밟았고 2008년 K리그 우승도 이끌었다.
그런 탄탄대로에 뜻밖의 장애물이 생겼다. 부상이었다. 백지훈은 2010년 8월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서 오른쪽 무릎 연골을 크게 다쳤다. 2011년 5월 수술대에 올랐다. 백지훈은 “8개월 동안 재활로 고쳐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며 “뒤늦게라도 수술을 받아야 했다”고 말했다.
수술을 받았지만 경과는 좋지 않았다. 의사가 완쾌하리라고 말한 5개월 여 시간이 지났지만 통증은 더 심했다. 2011시즌을 통째로 날린 백지훈은 상주 상무에 입대했고 군복무를 마친 뒤 수원으로 가지 못한 채 임대 선수 신분으로 울산 현대로 갔다. 이듬해 다시 수원으로 복귀했지만 자신이 뛸만한 자리는 없어 보였다.
그 때 백지훈에게 새로운 계기가 생겼다. 당시 김은선 등 수비형 미드필더 자원들이 부상으로 빠진 공백을 백지훈이 메워야 했다. 줄곧 공격요원으로만 뛰어온 그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그 때부터 그는 ‘머슴’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오랜 슬럼프에 허우적댄 자신을 받아준 수원 서정원 감독에게 어떻게 해든 보은해야한다는 생각으로 변화를 감내했다. 그는 “수비를 못한다는 말이 듣기 싫어서 더 몸을 날렸고 더 강하게 싸웠다”고 말했다.
고진감래의 시간은 그의 축구 철학을 바꿔놓았다. 화려함이 사라진 자리에 성실함이 자리했다. 백지훈은 “이전에는 내가 결승골을 넣어서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면서도 “그러나 지금은 온전한 몸으로 계속 뛸 수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밑바닥에 머문 동안 어느새 베테랑이 됐고 이전에 형들이 한 말이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백지훈은 “옛날에 (김)진우형, (김)남일이형, (조)원희형이 나에게 ‘너는 공격만 해 뒤는 내가 맡을 게’라고 한 말이 기억이 난다”며 “내 뒤를 받쳐준 형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옛날 형들의 임무를 지금 맡게 된 그는 “요즘은 나도 권창훈 등 후배 공격수들에게 ‘마음 놓고 공격해. 뒤는 내가 맡을 게’라고 말하고 있다”며 웃었다.
백지훈은 슬럼프를 초래한 게 부상이 아니라 그보다 앞선 나태함이었다고 말했다. 백지훈은 “어린 나이에 정상에 올랐고 거기에서 안주한 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다”며 “나는 말로만 큰 꿈을 이야기했을 뿐 실제로 몸으로 도전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실패한 원인을 타인이 아니라 자신에게 찾은 백지훈에게 실수는 한 번으로 족했다. 그는 “누구와 맞붙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어려운 시간을 버텼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며 “결과적으로 잘 되든, 못 되든 모든 답은 바로 내게 있다는 걸 알았다”며 손을 가슴에 갖다 댔다.
백지훈이 요즘 머리와 가슴에 담아두며 잊지 않는 말이 있다. “많은 땀을 흘리는 선수는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다”다.
백지훈은 현재 자신을 “누구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그걸 몸으로 실천하려는 행동의 결합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훈련하고 끈질기게 도전하는 노력파가 됐다. 그에게 부상과 슬럼프로 허우적댄 지난 5년은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큰 깨달음을 얻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