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축구 확대경]다 아는, 그러나 잊고 있는 '황제'호나우두

by임성일 기자
2008.12.10 18:40:55

[이데일리 SPN 임성일 객원기자]신격화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성 싶은 ‘축구신’ 펠레 이후, 우리 시대의 축구 황제로 군림했던 호나우두가 14년간의 유럽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코린티안스의 유니폼을 입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올 2월, AC밀란 소속으로 나섰던 리보르노와의 이탈리아 세리에A 경기 도중 무릎인대 파열 부상을 당한 뒤 오래도록 필드를 떠나있던 호나우두의 소식은 반가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전해주었다. 자칫 그대로 선수생명이 끝날 수도 있었으니 황제의 화려한 퍼포먼스를 조금 더 연장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더 이상 톱클래스 레벨에서 머물 수 없다는 뜻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싶으니 퍽이나 서글픈 일이다.
 
갖은 풍파를 겪었지만, 펠레 이후 황제의 칭호를 받았던 축구선수는 오직 호나우두뿐이라는 사실만으로 그의 가치는 빛난다. 지금부터 어지간한 축구팬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를 풀어놓을 참이다. 잊고 있었던 업적들을 함께 공유하면서 위대했던 우리 시대의 슈퍼스타를 다시금 기억해보자는 취지다.

자타가 공인하고 역사가 인정하는 가장 위대한 스트라이커 중 한명이 바로 호나우두다. 실상 ‘중 한명’이라는 표현도 다수의 취향을 고려한 괜스런 조심스러움에 가깝다. 단연 으뜸이었다고 칭해도 하자가 없다. 스피드, 드리블, 시야, 결정력, 센스까지 공격수가 갖춰야할 모든 조건을 빠짐없이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웨인 루니나 리오넬 메시, 카림 벤제마 등 젊은 공격수들의 우상이며 함께 하는 동료들에게는 자긍심을,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경외심을 느끼게 했던 흔치않은 플레이어였다.

10대 나이(1976년생)였던 1994년, 라이벌 아르헨티나와의 경기를 통해 A매치 신고식을 치렀고 곧바로 1994년 미국월드컵에 나서는 브라질대표팀에 합류했다. 호마리우와 베베토 등 선배들에게 밀려 대회 내내 벤치에 머물렀으나, 선수들이 차고 넘치는 브라질대표팀에서 10대 공격수가 23명 최종엔트리에 포함됐다는 것만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유럽무대 첫 진출이던 1994~95시즌 호나우두는 아인트호벤에 입단하면서 곧바로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득점왕(30골)을 차지했다. 여전히 호나우두의 나이는 10대였다. 1996~97시즌 스페인 바르셀로나 이적과 동시에는 37경기 34골이라는 놀라운 자취를 남겼다. 컵대회(코파 델 레이)와 유럽클럽대항전을 포함하면 해당 시즌 49경기 37골이라는 기록이 나오니 흔한 수식인 ‘득점기계’와 다름없었다. 이런 활약을 발판으로 호나우두는 1996년과 1997년 국제축구연맹(FIFA) 올해의 선수상 2연패를 달성한다. 약관의 플레이어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전을 꿰차고 출전한 1998년 월드컵에서 호나우두와 브라질은 프랑스의 ‘아트사커’에 밀려 아쉽게 준우승에 그친다. 하지만 호나우두는 대회 MVP를 차지했다. 준우승팀에서 최우수선수가 선정된 것은 호나우두가 처음이었으니 그를 향한 박수갈채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어장치 없는 질주를 거듭하던 호나우두에게도 시련이 있었는데, 프랑스월드컵 이후 찾아온 부상 악령이 그것이다. 실상 2년 이상을 개점휴업과 다름없는 상태로 지냈으니 재기불능이라는 암울한 의견도 심심치 않았다. 하지만 다시 일어섰다. 반신반의 속에 출전한 2002년 월드컵, 브라질 5번째 우승의 일등공신이던 호나우두는 날았다.

의심으로 가득 찼던 세상을 향해 호나우두는 “매 경기 득점하겠다”는 호언장담을 남겼는데, 거짓말 같은 허풍은 참이 되었다. 카리스마 골키퍼 올리버 칸을 상대로 했던 결승전 2골을 포함, 총 8골을 뽑아내면서 1978년 대회의 마리오 캠페스(아르헨티나) 이후 지겹게 이어지던 ‘월드컵 득점왕=6골’ 공식마저 깨뜨렸다. 이로써 호나우두는 1998년 대회의 4골을 포함, 월드컵에서만 12골을 기록하게 됐다. 이는 선배 펠레와 어깨를 나란히 한 브라질 통산 타이기록이었다.
 
당연히 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차군단의 게르트 뮐러가 보유하고 있는 월드컵 개인최다골(14)에는 2골이 부족했다. 응당 넘어야할 벽이었다. 하지만 호나우두가 2006년에도 삼바군단의 선봉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은 많지 않았다. 독일 월드컵을 향하는 브라질대표팀에는 호나우지뉴가 있었고 카카도 있으며 아드리아누와 호비뉴도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여전히 카나리아 군단의 에이스 킬러는 호나우두였다.

실상 8강에서 프랑스에게 0-1로 패해 대회를 마감하던 브라질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와중 의미 있는 획을 그은 인물이 있으니 바로 호나우두다. 가나와의 16강전 결승골(3-0)을 비롯해 총 3골을 추가한 호나우도는 통산 15골로 기어이 월드컵史 개인 최다골 부문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말았다. 극심한 골 가뭄에 시달렸던 전체적인 대회 흐름 속에서 호나우두보다 많이 넣은 선수도 독일의 미로슬라프 클로제(5골) 뿐이었으니 서른 살 스트라이커의 변치 않는 클래스가 새삼 놀라웠던 대회였다.

독일월드컵 이후 호나우두는 다시금 뚜렷하게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리고, 이제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다시 부활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애석하지만, 개인적으로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모습만으로도 호나우두는 충분히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플레이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후세에게 자랑할 수 있을만한 플레이어. 호나우두의 뒤안길이 부디 폄훼되거나 쓸쓸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