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 2008 리포트③] ‘호날두 우선주의’, 체코를 삼키다

by송지훈 기자
2008.06.12 18:37:38

▲ 12일 포르투갈-체코의 경기가 끝난 후 포르투갈 팬들이 경기장 밖에서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사진=송지훈 객원기자)

[제네바(스위스)=이데일리 SPN 송지훈 객원기자] 12일(이하 한국 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체코와 포르투갈의 A조 두 번째 경기는 ‘강호들의 맞대결’로 불리며 일찌감치 주목 받았다.
 
하지만 경기 시작 전 양 팀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개최국 스위스와의 개막전에서 고전 끝에 어렵게 승리한 체코는 “기대 이하”라는 혹평에 시달리며 잔뜩 가라앉은 반면, 같은 날 터키를 완파한 포르투갈은 “우승후보답다”는 호평 속에 신바람을 냈다.
 
11일 공식 인터뷰에 참가한 양 팀 감독들의 발언 내용에도 적잖은 차이가 있었다. 카렐 브뤼크너 체코 감독이 “승점3점을 챙겼는데 왜 혹평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과 달리 펠리페 스콜라리 포르투갈 감독은 “상대가 체격과 체력 면에서 우위를 지니는 데다 견고한 수비진을 갖췄지만 충분히 승리할 것으로 믿는다”며 여유 있는 태도를 유지해 대조를 이뤘다.
 
경기 전 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양국 언론인들의 반응 역시 비슷했다. 체코 일간지 ‘믈라다 프론타 드네스’의 마르틴 들라르첵 기자는 “첫 경기 직후 모든 자국 언론이 실망스런 경기력에 대해 맹비난을 퍼부었다”며 “오늘 경기를 앞두고 주축 선수 중 다수가 상당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포르투갈 언론인들이 “최소한 패하진 않을 것”이라며 자국대표팀의 역량에 자신감을 드러낸 것과 비교되는 상황이었다. ‘A조 빅 매치’로 손꼽히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승부였지만 양 팀에 대한 기대치에는 적잖은 차이가 있었던 셈이다.

결과만으로 평가하자면 경기 전 양 팀 분위기의 온도 차이가 최종 스코어(포르투갈 3-1승)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 셈이 됐다. 3골을 터뜨린 포르투갈은 환히 웃었고 패배한 체코 선수들은 고개를 숙였다.
 
본선 진출국 16개팀 중 상위권으로 평가받는 체코의 수비력을 감안하면 3골은 산술적인 가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데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히카르도 콰레스마 등 세 명의 선수가 고루 골 사냥에 성공한 점 또한 득점 다각화 측면에서 긍정적인 결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나 경기 MVP로 선정된 호날두는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2개의 공격 포인트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데쿠의 선제골 과정에도 기여하는 등 간판스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포르투갈 쪽으로 치우친 스코어와 달리 경기 내용은 치열한 접전으로 진행됐다. 특히 양 팀이 한 골씩 주고받은 전반전의 경우 외려 체코의 활발한 움직임이 더욱 돋보였다. 야로슬라프 플라실, 리보르 시온코 등 좌우 날개자원들의 측면 돌파가 빛을 발했고 최전방 공격수 밀란 바로스는 화려한 드리블 실력을 뽐내며 수비진을 농락했다.
 
반면 포르투갈은 좌측면에 포진한 ‘공격의 구심점’ 호날두가 이렇다 할 활약을 선보이지 못한 채 부진을 거듭해 공격전술을 풀어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중원을 폭넓게 움직이며 볼 배급의 출발점 역할을 소화한 플레이메이커 데쿠의 분전이 눈에 띄었을 뿐, 전체적으로 호흡과 움직임의 효율성이 기대에 못 미쳤다.



흥미로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콜라리 포르투갈 감독이 호날두를 중심으로 진행하는 공격전술의 틀을 변함없이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상대 진영으로 향하는 전진패스 중 상당수가 호날두의 발을 거쳤는데, 이는 경기 종료 시점까지 꾸준히 지속됐다. 터키와의 1차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부분으로, ‘측면 공격 루트 중 하나’ 정도로 여겨지던 유로2004, 2006월드컵 무렵과는 판이하게 다른 양상이기도 하다.
 
포지션 체인지와 관련한 감독의 배려 또한 눈여겨 볼 만 한 대목이다. 호날두가 왼쪽 터치라인 부근에서 체코 디펜스진의 협력수비에 막혀 돌파에 어려움을 겪자 스콜라리 감독은 전반 중반 이후 레프트 풀백 파울로 페레이라의 오버래핑 범위와 횟수를 늘려 부담을 덜어줬다.
 
후반 들어서는 아예 호날두를 중앙으로 옮겨 공격형MF 겸 그림자 공격수로 뛰도록 했는데, 이 과정에서 역할 중복을 피하기 위해 데쿠의 위치를 끌어내리고 공격가담 비율을 대폭 줄였다. 후반 중반 이후 데쿠가 양쪽 측면과 수비라인 근방에서 자주 눈에 띈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는 결국 스콜라리 감독이 호날두를 ‘득점과 승리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주 포지션에서 제 몫을 다하지 못한다면 제2, 제3의 자리로 옮겨서라도 에이스의 역량을 활용하겠다는 사령탑의 의지가 읽히는 까닭이다. 호날두가 위치를 바꾸면 포지션이 겹치는 선수는 역할 변경 내지는 교체를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동료들의 희생이 요구되는 부분이기도 한데, 그럼에도 ‘호날두 우선주의’가 유지되는 건 역시나 물오른 기량에 대한 기대감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장은 다소 부진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멋진 활약으로 승리에 기여할 것이라는, 간판스타에 대한 두터운 믿음 말이다.
 
 다행히도 호날두 또한 이러한 감독과 동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특유의 화려한 발재간이 살아나 펄펄 날았고, 골과 도움을 두루 기록하며 이베리아 군단의 선봉장 역할을 깔끔히 수행해 포르투갈 팬들을 열광시켰다. 꼭 필요한 상황에서 제 몫을 해내는 모습, 역시나 영웅이자 주인공다웠다.

경기 종료 직후 팬들과 기쁨을 나누는 포르투갈 선수들을 바라보며 두 가지 궁금증을 느꼈다. 스콜라리 감독의 ‘호날두 우선주의’는 언제까지 지속될까. 그리고 8강 이후 마주할 강호들과의 맞대결에서도 과연 같은 패턴이 먹혀들까. 올스타급 선수를 다수 보유한 호화군단이면서도 ‘호날두 원맨팀’ 스타일의 독특한 경기운영을 선보이는 포르투갈 군단의 향후 행보에 관심이 모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