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흐르듯 절묘한 세대교체...누가 나와도 어펜져스는 강하다

by이석무 기자
2024.08.01 15:25:37

1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 결승 시상식. 한국 대표팀 구본길, 오상욱, 도경동, 박상원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멤버는 바뀌어도 어펜져스는 여전히 강했다. 누가 태극마크를 달아도 금메달 주인은 변함이 없었다.

오상욱(27·대전광역시청), 구본길(35·국민체육진흥공단), 박상원(23·대전광역시청), 도경동(24·국군체육부대)이 팀을 이룬 펜싱 남자 사브르 대표팀은 1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단체전 결승에서 헝가리를 45-41로 제압하고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섰다.

이로써 한국 펜싱은 2012년 런던, 2021년 열린 2020 도쿄 올림픽에 이어 올림픽 남자 사브르 단체전 3연패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는 종목 로테이션으로 사브르 단체전이 열리지 않았다.

아울러 이 종목 개인전 금메달을 차지했던 ‘에이스’ 오상욱은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 첫 2관왕에 올랐다. 동시에 한국 펜싱 사상 첫 올림픽 2관왕이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남자 사브르는 한국 펜싱을 대표하는 자존심이나 다름없었다. 올림픽,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 등 각종 국제대회를 휩쓸면서 세계 최강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이번 파리올림픽을 앞두고 대표팀은 격변의 시기를 맞이했다. 도쿄올림픽과 항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일궈낸 김정환(40), 김준호(30)가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 것. 대신 신예인 박상원(23·대전광역시청), 도경동(24·국군체육부대)이 기존 멤버인 구본길, 오상욱과 함께 했다.

우려가 만만치 않았다. 김정환, 김준호의 존재감이 컸기에 그만큼 빈자리가 뚜렷했다. 실력적으로는 박상원, 도경동도 선배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의 중압감을 이겨낼 수 있을지는 물음표였다.

실제로 오상욱은 개인전 우승 후 인터뷰에서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털어놓았다. 그는 “형들(김정환, 김준호)이 나가고 나서 정말 큰 변화가 있었다”며 “정말 많이 박살 나기도 했고, 자신감을 잃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펜져스는 단지 펜싱만 잘해서 붙은 별명이 아니었다. 기존 멤버와 새로운 멤버가 ‘원팀’으로 뭉치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989년생 구본길은 베테랑답게 ‘맏형 리더십’을 발휘했다. 런던 대회에서 대표팀 막내로서 형들과 함께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대표팀이 낯선 후배들을 다독이고 격려했다.

지난달 28일 압도적인 실력으로 개인전 금메달을 따낸 오상욱은 팀의 에이스이자 구심점이었다. 도쿄 대회 막내에서 3년 만에 중고참이 된 오상욱은 후배들의 롤모델이자 실질적인 리더였다.



구본길, 오상욱의 노력 덕에 박상원, 도경동도 대표팀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그렇게 어펜져스는 파리에서 ‘뉴 어펜져스’로 진화했다. 신예들은 선배들에게 의지만 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순간마다 어김없이 제 몫을 해내면서 신무기가 됐다.

대표팀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막내’ 박상원은 단체전 1번 주자를 맡아 초반 분위기를 이끌었다. 빠르고 저돌적인 공격으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의 패기넘치는 모습에 다른 선수들도 함께 힘을 낼 수 있었다.

박상원은 개인전에서도 32강에서 세계랭킹 6위의 콜린 히스콕(미국)을 꺾는 등 차세대 에이스로서 가능성을 확실히 보여줬다.

88cm 장신으로 체격조건이나 플레이 스타일이 오상욱과 닮아 ‘리틀 오상욱’으로 불리는 도경동은 4강전까지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구본길-오상욱-박상원이 좋은 경기력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준결승전이 끝난 뒤에는 “뛰지 못해 근질근질하다”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도경동은 가장 중요한 순간 ‘신스틸러’가 됐다. 30-29로 쫓긴 7라운드에 구본길을 대신해 피스트에 올라 1점도 내주지 않고 연속 5점을 뽑았다. 그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한 아쉬움을 단숨에 씻는 활약이었다. 도경동의 활약은 단체전 금메달을 굳히는 결정적 터닝포인트가 됐다.

한국 남자 사브르 단체는 늘 세대교체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2012 런던 대회에서 금메달을 일군 ‘원조 어펜져스’ 멤버는 김정환, 오은석, 원우영, 구본길이었다. 대회가 끝난 뒤 오은석과 원우영이 빠지고 그 자리를 오상욱과 김준호가 메워 도쿄올림픽을 제패했다. 그리고 김정환, 김준호가 떠나자 박상원, 도경동이 등장해 파리오림픽을 정복했다.

이처럼 끊임없이 좋은 선수가 나오는데는 대한펜싱협회의 적극적인 투자가 큰 역할을 했다. 2003년부터 SK그룹이 회장사를 맡고 있는 협회는 최대한 많은 선수들에게 국제대회 경험 기회를 안겼다. 또한 코치 및 의무·체력 트레이너 등을 늘리는 등 경기력 향상을 위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오상욱은 단체전 금메달 직후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어펜저스는 워낙 농익은 사람들이 많았다면 뉴 어펜저스는 조금 더 힘차고, 패기가 넘친다”며 “지금은 내 시대가 아니라 ‘어펜저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강조했다.

단체전 3연패를 모두 함께 한 구본길은 “런던 올림픽 금메달이 여기 있는 남자 사브르 선수들을 모두 이 자리에 있게 만든 메달”이라고 앞선 선배들을 떠올렸다. 이어 “실력만 보면 지금의 뉴 어펜져스가 더 뛰어나다”며 “무조건 금메달을 딸 것으로 생각했다”고 미래를 이끌 후배들을 칭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