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N리뷰]`써니`, 달콤 쌉싸래한 인생의 단면
by장서윤 기자
2011.04.20 11:02:31
[이데일리 SPN 장서윤 기자] `인생의 가장 눈부신 날들을 보내는 소녀들에게 바칩니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DJ 이종환의 목소리를 통해 극중 흘러나오는 멘트는 영화 `써니`(감독 강형철)의 분위기를 대변한다.
일곱 여고생들의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며 1980년대 추억 코드를 오롯이 담아낸 이 작품은 잘 짜여진 대중성을 담보하면서도 독특한 감성을 놓치지 않은 수작으로 남을 듯하다.
안정된 가정을 꾸려가며 한 남자의 아내로, 딸의 엄마로 살아가는 마흔 둘의 주부 임나미(유호정)는 남부러울 것 같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뭔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는 나이다.
투병중인 친정 엄마의 병문안에 나섰던 나미는 우연히 마주친 고교 시절 친구 춘화(진희경)가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음을 알고 춘화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여고시절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25년 전 전라남도 벌교에서 전학생으로 서울에 상경한 나미는 일명 여고 칠공주파 `써니`의 리더였던 춘화, 미스코리아를 꿈꾸던 복희(김보미·김선경) 얼음공주 수지(민효린) 밝고 엉뚱한 장미(김민영·고수희) 욕쟁이 진희(박진주·홍진희) 문학소녀 금옥(남보라·이연경)을 만나면서 `써니`에 합류하게 된다.
현실 속에 조금은 일그러지고 퇴색됐지만 여전한 `써니`의 모습을 간직한 이들은 서로를 만나면서 잊고 있었던 추억을 찾아간다.
영화는 누구나 조금씩은 겪었을 법한 고교 시절 사건을 더듬어가며 1980년대의 감성을 담아낸다. 보니엠의 `써니`(Sunny) 리처드 샌더슨의 `리얼리티`(Reality) 조이의 `터치 바이 터치`(Touch by touch) 등 그 시절 인기 팝송이 영화 전반부에 흐르면서 칠공주들의 추억을 따라간다.
종로 번화가, 전경과 학생의 대치 속에 팝송이 나오면서 패싸움에 나선 여고생들의 발차기가 공존하는 장면은 독재 정권 하에서 급격한 서구 문화의 유입을 겪으며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한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데뷔작 `과속스캔들`에서 그랬듯 강형철 감독은 특유의 대중적이고 맛깔스러운 연출력으로 영화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작품을 유쾌하게 풀어낸다.
병원에서 환자들이 TV를 보다 `불치병` `출생의 비밀` 등으로 이어지는 일일극에 분노하는 장면 등 한국판 막장 드라마를 재치있게 비꼬는 장면이나 1980년대 여고생들의 약간 유치한 듯한 유행 코드를 쏠쏠하게 담아낸 점은 작품에 또다른 유머를 선사한다.
음악 다방, 면도날 씹는 여고생, 첫사랑 오빠, 고교 내 동성애 코드 등 그 시절 여고생들의 단면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 전개가 밝지만은 않은 점은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인생의 단면을 반영하는 듯하다. 고교 시절 수많은 꿈을 뒤로 하고 때로는 현실에 치이는 듯한 주인공들의 모습이나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전환을 맞는 장면 등은 복잡다단한 인생의 다양한 면을 보여준다. 또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곽지균 감독의 대표작 `겨울 나그네`에 대한 오마주를 반영하는 장면도 쓸쓸함을 자아낸다.
아역과 성인 역할을 넘나드는 10여명 배우들의 연기도 영화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힘을 뿜어낸다.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나미 역의 유호정은 안정감있는 연기를 보여주는 데 이어 매 작품마다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는 심은경의 성장도 놀랍다. 특히 심은경은 걸쭉한 남도 사투리와 눈물과 욕설, 웃음 연기를 오가며 성인 연기자 못지 않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오랜만에 스크린에 나선 진희경과 홍진희 등 중견 배우들도 극 분위기와 잘 어우러졌다.
종합선물세트같은 전반부와 달리 급격하게 달려가는 후반부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지만 `써니`는 올 상반기 가장 눈에 띄는 영화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데 의심할 여지가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