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현 “나는, 덩치만 크고 힘만 셌다”

by경향닷컴 기자
2008.12.30 09:52:28

[경향닷컴 제공]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나는 기분입니다. 한 껍데기를 벗고,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로 2009년의 의미를 찾고 싶습니다.”

새해,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는 ‘돌아온 천하장사’ 이태현(32·구미시청)의 표정은 아주 밝았다. 3년 가까이 고생한 격투기의 그늘을 털고 씨름계로 돌아왔다는 사실부터 그를 편하게 만드는 듯했다.

“떠날 때 반대하고 비판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이렇게 따뜻하게 받아주시는 선·후배님들이 무척 고맙고요. 솔직히 마음이 정말 편합니다. 격투기를 하는 동안 동료가 그리웠거든요. 개인운동인 격투기와 달리 씨름은 붙잡고 넘어뜨리고, 일으켜 세워주고…. 운동하는 분위기부터가 매우 푸근하죠.”

모래판으로 돌아와 웃음을 되찾은 그를 29일 오후 서울 강남구 선릉역 인근의 한 피트니스센터에서 만났다. 잘나가던 씨름선수에서 낯선 분야인 격투기에 뛰어들어 쓴맛을 보고 돌아온 그가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이야기는 많은 것을 공감하게 했다. 이태현은 “인생을 배운 시기였다. 한때는 내가 최고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겸손을 배웠다”고 말했다.

대구 집과 구미 훈련장을 오가며 매일 5~6시간 정도 훈련에만 열중하다, 후배 결혼식에 맞춰 상경한 이태현은 예식 시작까지 남는 잠시의 시간도 아까워 헬스장을 찾아 근육을 만들었다.

천하장사 3회, 지역장사 12회, 백두장사 18회 등 민속씨름에서 37번이나 꽃가마에 오른 이태현이 갑자기 격투기로 뛰어든 이유를 본인의 입을 통해 다시 듣고 싶었다. 이태현은 “사실 그때 현역은퇴를 준비 중이었다”고 했다. 10년 넘게 뛴 현역생활을 접고, 박사과정을 마친 용인대에서 강사로 활동하면서 지도자 수업을 받으려던 차에 그의 은퇴소식을 접한 격투기 에이전트 측에서 집요하게 접근해온 게 계기였다.

“처음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집요한 설득을 당하면서 새로운 도전의식이 생겼습니다. 격투기 선수들이 받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거죠.”



그러나 격투기는 결코 호락호락한 세계가 아니었다. 씨름과 격투기는 기본부터 달랐다. “기초, 기본자세부터 시작했다. 다른 선수들은 10년 이상 해왔는데, 난 덩치만 크고 힘만 셌으니….” 이태현은 “5년만 빨리 준비했더라도 달랐으리란 생각을 했다. 한 단계 한 단계 배워 올라갈 땐 큰 성취감을 느꼈지만 소요기간이 너무 길었다”고 말했다. 이태현은 격투기 훈련을 시작한 지 불과 한 달 뒤인 2006년 9월 일본 사이타마에서 열린 프라이드 대회에 출전해 한 물간 선수인 모라예스(브라질)에게 참패를 당했다.

“너무 쉽게 생각하고 대회에 나갔다. 준비기간이 너무 짧았다”는 이태현은 그때 겪은 마음고생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충격적인 패배 뒤 3달 동안은 대구 집에서 나오기 싫었다. 지인 병문안이라도 가서 인사하고, 사인 요청에 응하고 오면 뒤에서 인터넷으로 댓글을 달고 비아냥거렸다. 한가하게 놀러다니느냐고. 아는 사람이 뒤에서 더 많은 욕을 해댔다. 사람이 무섭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씨름선수 시절엔 경기에 지면 주위에서 격려해주는 사람이 많았지만, 격투기에선 그렇지 않았다. 그는 “주위의 시선이 너무 차가웠다. 기사도 너무 비판적이었다. 죄인 아닌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분위기에 상처받아 동네 슈퍼마켓에 나가기도 싫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심적 고통을 겪은 이태현은 2007년 3월 러시아로 날아가 표도르 캠프에서 4개월가량 격투기 수업을 받았다. “그 정도 훈련을 받고 격투기에 데뷔해도 늦지 않았을 텐데 너무 서둘렀다”고 돌이킨 이태현은 “그해 10월 열린 대회에서 첫승을 거뒀을 땐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태현은 지난 6월 세번째 격돌에서 오브레임(네덜란드)에게 참패를 당하고 만다. 해볼 만한 상대였는데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씨름복귀를 결심했다.

“시기가 이르긴 했지만 격투기로 떠날 때부터 씨름으로 돌아올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는 이태현은 “항공사 승무원 일을 하는 아내(이윤정씨·29)와 장기간 집을 비우는 바람에 아빠도 알아보지 못하는 아들(승준·3), 그리고 부모님 등 주위분들이 내 자리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란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죄인이 돼서 돌아오는 기분에 미칠 것만 같았는데, 주변의 환대가 정말 고마웠다”는 이태현은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씨름선수로 돌아온 만큼 침체된 씨름 부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 설날대회부터 장사에 오른다는 것은 욕심이겠지만 목표는 가장 높은 곳에 두겠다”고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