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치 장벽' 못 넘은 골든글로브…'미나리' 외국어영화상 지명 논란 번지나

by김보영 기자
2021.02.04 09:47:06

뉴욕타임스 "윤여정 등 출연진 지명 못 받아" 아쉬움
익스플로어, 베니티페어 등 "HFPA 규정 바꿔야"
영어 50% 이상 규정 비판→"미국적인 게 뭔가" 화두로

영화 ‘미나리’ 포스터. (사진=선댄스 영화제)
[이데일리 스타in 김보영 기자] ”

지난해 1월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린 제77회 골든글로브상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은 이같은 수상소감을 남겨 화제를 모았다. 이 수상 소감 이후 ‘기생충’은 그 해 외국어영화상이란 타이틀을 뛰어넘고 아카데미 시상식 최고 권위인 ‘작품상’을 수상한 최초의 작품이 됐다. 그럼에도 봉 감독이 그토록 허물길 바랐던 1인치 장벽이 골든글로브에선 여전히 견고했다.

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가 골든글로브상 외국어영화상 최종 후보로 지명됐다. 그러나 미국 제작사가 만든 미국인 감독의 작품임에도 ‘작품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점, 유력한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후보였던 출연진들이 후보에 한 곳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점이 ‘인종차별’ 논란으로 또다시 불거질 전망이다.

골든글로브를 주관하는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HFPA)는 3일(현지시간) 제78회 골든글로브상 후보작을 발표하며 ‘미나리’를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지목했다.

이에 ‘미나리’는 덴마크의 ‘어나더 라운드’, 프랑스-과테말라 합작의 ‘라 로로나’, 이탈리아의 ‘라이프 어헤드’, 미국-프랑스 합작의 ‘투 오브 어스’ 등 다른 후보자들과 수상을 놓고 다투게 됐다.

그러나 앞서 다른 미국의 크고 작은 영화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20관왕을 휩쓸었던 윤여정과 남우조연상 3관왕을 수상한 스티븐 연 등 주요 출연진들은 후보작에 아쉽게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주요 출연진들이 후보 지명에서 제외된 것을 둔 현지 외신들의 반응 역시 비판적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미나리’ 출연진은 배우 후보 지명을 받을 만했는데도 하나도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고, LA타임스 역시 윤여정을 포함한 배우들의 후보 지명 불발에 유감의 뜻을 표했다.

익스플로어는 “윤여정은 영화에서 수많은 활약을 보여준 유력 여우조연상 후보였음에도 깜짝 후보로 지명된 조디 포스터에 그 자리를 내줘야 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HFPA의 낡은 규정 때문에 ‘미나리’가 작품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익스플로어는 “‘미나리’는 궤도 꼭대기에서 선구자로서 매우 뛰어난 몇몇의 성과들을 일궈낸 작품이었지만, HFPA가 오랫동안 유지해 온 논쟁적인 규정 때문에 최고의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HFPA의 규정은 비슷하게 지난해 오스카 최고의 작품상을 받은 ‘기생충’이 골든글로브의 상위 경쟁 대진표에 이름이 올리는 것을 막아섰지만, ‘기생충’이 1인치의 장벽을 뚫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기생충’이 1년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의 기록을 남긴 최초의 외국어 영화란 역사를 만들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버라이어티는 ‘미나리’를 앞서 같은 이유로 지난해 ‘기생충’과 함께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던 룰루 왕 감독의 ‘페어웰’과 함께 언급하며 HFPA 규정이 개선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버라이어티는 “‘페어웰’ 역시 골든글로브 웹사이트 국가 분류에선 ‘미국’으로 표시됐음에도 극 중 대화의 50% 이상이 중국어로 표현됐다는 이유로 수상이 불발됐다”라며 “이 모순적인 상황은 반드시 개선되고 재고되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지명된 ‘미나리’. (사진=골든글로브 시상식 홈페이지)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 감독 정이삭이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1980년대 미 아칸소주(州)로 이주해 농장을 일구며 정착하는 한인 가정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린 작품이다. 미국의 인기 드라마 ‘워킹데드’, 한국 영화 ‘버닝’에 출연해 유명해진 한국계 미국인 배우 스티븐 연과 한예리, 윤여정 등이 출연해 이민 가족들이 겪는 내적, 외적 갈등과 삶의 애환을 연기했다.

‘미나리’는 지난해 일찌감치 선댄스영화제에서 공개되며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받는 등 주목을 받았다. ‘미리 보는 아카데미상’으로 평가되는 미국영화연구소(AFI) 선정 ‘2020 AFI 어워즈’에서 10대 영화에 올랐고, 112년 역사의 전미비평가위원회에서 여우조연상과 각본상을 받는 등 수십 편의 상을 휩쓸며 아카데미 기대주로도 올라섰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골든글로브의 작품상 후보로 오를 것이라 전망됐으나 외국어영화상 부문으로 분류된 소식이 알려지며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HFPA는 대화의 50% 이상이 영어가 아닌 경우 외국어 영화로 분류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이 규정으로 ‘미나리’는 브래드 피트가 만든 미국 제작사 플랜B가 제작했고, 감독 역시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극 중 주로 한국어가 사용됐다는 이유로 외국어 영화로 간주됐다.

룰루 왕 감독은 이를 두고 “나는 올해 ‘미나리’보다 더 미국적인 영화를 본 적이 없다”며 “그건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이자 미국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추구하는 이야기다. 오직 영어만 사용하는 것으로 특징짓는 구식 규정을 바꿔야 한다”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베니티페어의 편집자 플랭클린 레오나드 역시 “쿠엔틴 타란티노의 작품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도 대부분 영어 대사가 아니었지만 ‘미나리’와 같은 방식으로 분류되지 않았음을 잊지 말자”고 당부했고, 감독 겸 제작자 필 로드도 ‘어리석은 결정’이라 표현하며 골든글로브 보이콧을 선언한 바 있다.

유명 작가이자 퓰리처상 수상자인 베트남계 미국인 비엣 타인 응우옌은 지난달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칼럼에서 “언어가 ‘외국적’의 기준이 된다는 주장은 미국에서 백인에게 사실일 수 있지만, 아시아계는 영어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외국인으로 인식되는 듯하다”라고 지적하며 ‘미나리’와 HFPA의 규정이 영화계 전체에 ‘미국적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진 셈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골든글로브상은 아카데미상(오스카)과 함께 미국의 양대 영화상으로 꼽힌다.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아카데미 시상식보다 약 한 달 먼저 열려 ‘오스카의 전초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만큼 미나리가 골든글로브상을 받을 경우 아카데미상까지 거머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지난해에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한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골든글로브상 외국어영화상을 탄 바 있다.

한편 제78회 골든글로브상 시상식은 이달 28일 NBC 방송과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생중계된다.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결정으로, 골든글로브상 시상식이 온라인으로 열리는 것은 처음이다.

‘미나리’는 3월에서 국내 개봉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