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남아공) '압박 전문가' 그리스, 압박에 무너지다

by송지훈 기자
2010.06.13 12:11:07

▲ 그리스 MF 카추라니스와 볼을 다투는 김남일(오른쪽, 사진=Gettyimages/멀티비츠)

[남아공 = 이데일리 SPN 송지훈 기자] 한국축구대표팀(감독 허정무)이 '압박축구의 대가'로 손꼽히는 그리스(감독 오토 레하겔)와의 맞대결에서 한 수 위 압박 능력을 과시하며 시원스런 완승을 거뒀다.

한국은 지난 12일 밤(이하 한국시각) 남아공 포트엘리자베스 소재 넬슨만델라베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그리스와의 남아공월드컵 본선 B조 조별리그 경기서 전반과 후반에 각각 한 골씩을 터뜨려 2-0으로 승리했다.

이로써 한국은 축구사를 통틀어 처음으로 원정 월드컵 대회에서 유럽 팀을 꺾는 기쁨을 맛봤다. 아울러 조별리그 첫 승과 함께 승점3점을 거머쥐며 목표로 삼은 '원정 월드컵 첫 16강'에 한 발짝 다가섰다.



이날 경기는 한국의 일방적인 우세 속에 진행됐다. 전반7분만에 세트피스 찬스를 활용해 선제골을 터뜨린 한국은 이후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그리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철저한 압박 능력이 빛났다.

중앙미드필더 듀오 김정우(광주 상무)와 기성용(셀틱)이 '1차 저지선' 역할을 수행하며 그리스의 볼 흐름을 적극적으로 차단했다. 상대가 이를 뚫고 위험지역 인근으로 접근하더라도 포백 디펜스라인이 적절한 협력수비를 통해 측면으로 몰아냈다. 공격수들의 발이 묶인 그리스는 이렇다 할 힘 한 번 써보지도 못한 채 스스로 무너져내렸다.



압박에 가담하기 위해 포지션을 이탈한 선수들의 빈 자리는 인근 동료들이 적극적으로 메웠다. 이와 관련해 오른쪽 풀백 차두리(프라이부르크)는 경기 후 가진 인터뷰에서 "상대 공격수를 마크할 때와 오버래핑을 시도했을 때 내 자리를 대신 맡아 줄 선수가 미리 정해져 있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플레이가 임기응변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물이다.



이와 관련해 한가지 아이러니컬한 점은 그리스야말로 유럽축구를 대표하는 '압박의 강자'라는 사실이다.

레하겔 감독이 이끄는 그리스는 유로2004 무대에서 '강한 압박'과 '효과적인 역습'이라는 두 가지 장점을 적극 활용해 정상에 올랐다. 볼을 잡은 상대선수를 유기적인 협력 플레이를 통해 압박하는 그리스 선수들의 플레이스타일은 21세기를 맞은 세계축구계에 '압박 축구'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몰고 올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스가 남아공월드컵을 앞두고 치열하기로 소문난 유럽 지역예선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압박의 힘'에 기댄 바 컸다. 레하겔 감독이 유로2004 당시 우승을 이끈 노장들을 여전히 주축 멤버로 기용하는 것 또한 '압박 전술에 대한 이해도'를 기준으로 라인업을 짰기에 가능한 결과다.

때문에 그리스가 한국의 압박에 무릎을 꿇은 건, 더욱 눈길이 가는 뉴스다. 이에 대해 레하겔 감독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경기 후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우리 선수들은 경기 내내 어디에 서 있어야 할 지 모른 채 허둥대기만 했다"며 압박 플레이의 부재를 꼬집었다.

'압박 스페셜리스트' 그리스와의 정면승부에서 진가를 발휘한 '한국식 프레싱'은 어느 정도의 완성도와 위력을 갖췄을까.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등 나머지 상대들과의 경기 결과에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