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들의 친구 야구] 박찬호의 노련미, ‘고의 만루책’
by한들 기자
2008.04.10 14:40:00
[로스앤젤레스=이데일리 SPN 한들 통신원] 빅리그 15년차 박찬호가 올시즌 들어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노련미입니다. 특히 볼 배합에서 그렇습니다. 시범경기서 볼카운트 투 나싱 같은 변화구 타이밍에서도 과감하게 패스트볼을 가운데로 찔러 넣어 상대 타자를 깜짝 놀래키며 삼진을 솎아내는 모습이 몇 번 있었습니다.
10일(한국시간) 애리조나전서 박찬호가 6회 2사 1,2루서 나와 만루까지 몰리면서도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노련함과 깊은 연관이 있었습니다.
박찬호는 선발 구로다가 2사 만루서 에릭 번스에게 2타점 좌전 안타를 맞아 3-4로 뒤집힌 가운데 등판했습니다. 애리조나의 찬스는 2사 1,2루로 계속됐고 타석에는 3번 타자 올랜도 허드슨이 등장했습니다.
이 때 상황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점만 더 내주면 애리조나로 흐름이 완전히 넘어가는 분위기였습니다. 더욱 허드슨은 박찬호가 까다롭게 생각하는 왼쪽 타자였습니다.
박찬호는 허드슨에게 좀처럼 승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초구 볼 뒤 원원서도 내리 2개의 유인구를 던졌습니다. 볼카운트 원 쓰리.
하지만 박찬호는 불리한 볼카운트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5구째도 81마일 바깥쪽 체인지업 유인구를 던졌습니다. 놔뒀으면 볼이었습니다. 그러나 허드슨의 방망이는 당연히 돌았습니다.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배팅 찬스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풀카운트. 박찬호로서도 허드슨의 헛손질에 충분히 승부의 유혹을 느낄만한 순간이 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박찬호의 선택은 다시 유인구였습니다. 요즘 가장 자신 있어 하는 93마일 패스트볼을 몸쪽 높게 꽂은 것이었습니다. 휘두르면 좋고 안쳐도 손해 볼 것 없다며 던진, 명백한 버리는 공이었습니다. 박찬호의 기대와 달리 허드슨의 방망이는 돌아가지 않아 포볼이 되면서 상황은 2사 만루가 됐습니다.
일견 등판하자마자 박찬호가 제구력이 흔들려 포볼을 내준 것 같았지만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의도된 박찬호의 만루책이었습니다.
왜 그런가요? 후속 4번 타자가 바로 크리스 버크였기 때문입니다. 버크는 원래 4번 타자였던 코너 잭슨이 4회말 구로다에게 몸맞는 볼로 나간 뒤 5회 초부터 1루 대수비로 나온 백업요원이었습니다(버크의 포지션은 2루입니다). 박찬호가 굳이 허드슨과 상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은 더 약한 타자, 버크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물론 허드슨에게 포볼을 내준 것은 벤치와의 합의가 전제됐을 것입니다).
만루에 몰렸지만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 상황에서는 1점을 주나, 2점을 주나 실점을 하면 경기는 그것으로 끝이었기 때문입니다(실제로 다저스는 박찬호에 이어 가장 확실한 셋업맨인 조나단 브락스턴을 투입해 기회를 봤고 경기도 4-3, 그대로 끝났습니다).
결국 박찬호는 버크에게 초구 94마일 패스트볼로 헛스윙을 유도한 뒤 87마일 슬라이더로 2루 플라이를 솎아내며 거뜬히 위기를 넘겼습니다.
2보 전진을 위해 스스로 1보 후퇴를 선택한 박찬호의 노련한 ‘의도적인 만루책’이 빛을 본 장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