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전 오늘, IMF①]'불황 속 활황'...IMF 가요계를 '아시나요'
by최은영 기자
2008.12.03 12:59:14
[이데일리 SPN 최은영기자] "가요 매니저 절반 이상이 실업자예요"
"요즘 같을 때 음반 내면 바보 소리 듣기 십상이죠. 계산도 못하느냐구요"
"매니저 생활 20년인데 한마디로 최악입니다. IMF 당시가 오히려 그리워요"
요즘 가요 매니저들 사이에선 탄식이 끊일 줄 모른다. 아무리 불경기에 계절도 겨울이라지만 추워도 이렇게 추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서태지 동방신기 빅뱅 비 김종국 등 대형스타들의 잇따른 복귀로 언뜻보면 가요계가 다시금 활기를 찾은 듯도 보인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게 가요계 종사자 및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가장 큰 문제는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시장의 자금줄이다. 불황은 가요계 전방위에 걸쳐 드리워져 있다. 신인가수를 비롯 많은 팀들이 앨범 준비를 마친 상황에서도 적자가 눈에 보여 섣불리 음반을 낼 생각을 못하고 있다. 이동통신사 및 음반유통사 등에서 제작사에 지급하는 일명 '마이킨'이라 불리는 선급금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IMF 당시가 그립다"는 한 제작자의 일성은 현 가요계가 처한 상황을 극명하게 말해준다.
그렇다면 IMF 당시 가요계는 도대체 어떠했길래 라는 궁금증이 남는다. 사실 당시 가요계는 나름 호황을 누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일부 기획사들이 잇따라 문을 닫는 등 불황의 그림자를 온전히 비껴갈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한 음반 제작자는 "그 당시만해도 음반시장이 건재했고, 사람들 주머니 속에는 이상한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돈이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요즘 불황은 그 수준과 체감 정도가 확연히 다르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주식, 펀드 등에 손발이 묶인 사람들은 좀처럼 주머니 속에서 돈을 꺼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 주머니 속에 현금 자체가 현격히 부족하다.
더욱 큰 문제는 음원시장의 잘못된 수익구조다. 가요계는 2000년대 초반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음반시장에서 음원시장으로 재편되면서 불치에 가까운 홍역을 앓게 됐다. 노래를 제작해 대중적으로 히트를 친다고 해도 현재와 같은 구조에선 제작자 또는 가수가 좀처럼 수익을 내기 어렵다. 음원 가격이 최악으로 저평가되어 있는 데다가 통신사 및 유통사가 음원수익의 70~80%를 가져가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제작 자체가, 히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바로 그래서다.
올 하반기 대박 히트를 기록한 모 그룹이 속한 대형 기획사가 최근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는 것만 봐도 현 가요계가 얼마나 모순되고 기형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대중음악은 늘 시대상을 반영한다. 당시 가요계는 대내외적인 경기 침체, 주가 하락, 환율 상승, 높은 실업률 등 우울한 뉴스가 주를 이루는 상황에서도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노래들이 적잖이 선보여졌다.
'사나이 가는 길에 기죽지 마라 / 없어도 자존심만 지키며 / 눈물 따윈 내게 없을거야'라는 가사의 노래, 기억할 것이다.
'폼생폼사'라는 부제가 붙은 젝스키스의 '사나이 가는 길'도 IMF 당시 우울한 서민들에게 파이팅을 외치는 희망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최근 제2의 불황을 겪고 있는 가요계에 빅뱅의 '붉은 노을'을 비롯해 윤종신의 '즉흥 여행', 힙합듀오 마이티 마우스의 '패밀리' 등 희망을 노래하는 가요들이 다시금 하나 둘 등장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IMF 당시와 유사한 상황일지 모른다.
이렇듯 우리 가요계는 IMF를 나름 슬기롭게 극복해냈다. 당시 가요계로 거슬러 올라가 현 위기상황을 극복해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보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IMF 당시 희망가가 2008년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처럼 나름의 해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으로 그 시대를 되짚어봤다.
| ▲ HOT-SES-젝스키스-핑클(사진 맨 위부터 시계 방향 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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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가요계는 음반판매에 영향을 미치기 보다는 장르적 변화가 컸다.
1997년말 닥쳤던 IMF의 영향은 사실상 1998년에 나타났다. 당시의 가장 큰 변화라 할 수 있는 것은 애절한 발라드의 강세와 함께 아이돌 1세대의 활약을 들 수 있다.
직장폐쇄, 정리해고의 우울한 시간을 맞았던 우리네 가게는 자신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수 있는 따뜻한 노래가 필요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김종환의 등장이다. 1996년 드라마 삽입곡인 '존재의 이유'라는 노래로 길보드 차트에서 빅히트를 기록했던 김종환은 98년 '사랑을 위하여'라는 노래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애절한 가사의 이 노래는 암울했던 우리네 가족들에게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게 했다.
또다른 장르적 변화로는 트로트의 강세를 꼽을 수 있다. 95년부터 대한민국 가요계는 아이돌의 강세가 두드려졌다. 히트곡들 대부분이 아이돌에게서 나왔다. 신세대들의 니즈에 맞게 나온 아이돌은 이후에도 강세가 계속됐지만 외환위기라는 터닝포인트를 계기로 트로트, 성인가요 장르가 다시금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직장생활로 바빠 주위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성인들이 자신의 삶의 변화를 겪으면서 노래를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된 요인도 컸다. 지금 맹활약하고 있는 태진아 설운도 송대관 등 대부분의 성인가수가 당시에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98년에는 길보드 차트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길보드 차트는 길거리 노점상에서 파는 불법음반에 수록된 순위를 일컫는 말로 당시 길보드 차트에 오른 노래는 어김없이 빅히트를 기록했다. 길보드 차트의 인기에는 당시 어려웠던 경제사정도 한몫했다. 10대들이 정품음반을 고집한 것과 달리 성인들은 불법이지만 자신들이 좋아하는 노래가 종합모듬세트로 담긴 길보드표 음반을 선호(?)했다. 길보드표 불법 테이프는 이후 장르별로, 세대별로 다양한 음악을 담아 놓아 눈길을 끌기도 했다.
98년은 사회적으로 불황이었지만 가요계로서는 사실상 호황이었다. 이는 유통, 수익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당시에는 레코드사가 제작자에게 마이킨(선급금)을 미리주는 단순한 수익구조였다. 또 휴대전화가 크게 대중화되기 전이라 10대들이 돈을 쓸 곳이 음반외에 특별히 없었다. 이런 구조이다보니 음악제작자는 우위를 가지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디지털 음원 구조이다보니 수익금의 상당수가 유통마진으로 빠지게 되고 음악을 공짜로 들을 수 있는 구조가 워낙 다양하다보니 수익 자체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이 시기엔 음악적으로 다양한 장르가 나왔으며, 활황이다보니 음반 관계자들도 자신감을 갖고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했다.
아이돌의 인기는 팬클럽의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서태지의 성공을 보면서 기획사들은 아이돌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팬층을 조직적으로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이후 사서함과 커뮤니티를 통해 이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게 된다. 특히 당시에는 풍선 색깔로 팬클럽의 존재를 알리기도 했는데 HOT 의 흰색 풍선과 god의 파란색 풍선은 많은 가수들이 참석하는 드림콘서트 때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팬클럽에 대한 애착도 무척 강했다. 지금은 동방신기를 좋아하면서 SS501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한번 HOT면 끝까지 HOT여야 하는 분위기였다.
당시의 아이돌 붐은 지금의 아이돌 붐과 다른 차이가 있다.
IMF 즈음엔 HOT, 젝스키스, 핑클, SES 등 그룹의 활동이 활발했다. 당시 아이돌의 붐은 가요계의 자금력이 한 몫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음반업계 한 관계자는 "지금의 아이돌이 생존형이라면 당시의 아이돌은 엄청난 자본을 앞세워 유행 트렌드를 이끌어 가는 새로운 아이콘에 가까웠다"면서 "같은 아이돌이지만 유행과 접근 방식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때가 90년 아이돌의 마지막 절정기였다. IMF 외환 위기가 터지면서 중흥기를 맞았던 가요계도 차츰 내리막 길을 걷게 된다. 어차피 10대들의 구매력이란 부모의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비층 약화는 고스란히 음반 불황으로 이어졌다.
97년과 98년 KBS MBC SBS 등 지상파 방송 3사 가요대상을 휩쓴 HOT는 99년 처음으로 가수 조성모에 대상 자리를 내줬고, 이어 가수 이수영과 이효리가 가요계에 돌풍을 몰고옴으로써 10대 중심의 대중가요 지형도가 20대 이상으로 좌표 이동됐다.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용기를 줄 수 있는 희망가가 인기를 끌었다. 대표적인 가수가 강산에였다. 그는 '넌 할 수 있어' '연어' 등으로 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로 낙담했던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크라잉 넛도 급부상했다. 어두운 시기 뭔가를 터트리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크라잉 넛의 '말달리자'는 울분을 쏟아내기에 충분한 노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