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N 명예기자석]1996년 김민호와 2007년 호세
by고남욱 기자
2007.06.15 17:38:34
[이데일리 SPN 고남욱 명예기자] 2004년 5월까지 부산 동의대 감독직을 맡았던 김민호(46, 前 롯데 타격 코치)는 부산고, 동국대를 졸업하고 1984년 롯데에 입단했다. 1996년 은퇴할 때까지 13년간 통산 1207경기에 출장. 통산 평균 타율 0.278, 홈런 106개를 기록하며 강병철 롯데 자이언츠 감독(61)이 이끄는 1984년, 1992년 롯데자이언츠 한국시리즈 우승의 순간을 함께 했다.
1990년 올스타전 MVP를 수상하기도 했으며 자갈치라는 낯익은 별명과 미스터 롯데로 불려도 좋을 만큼 인기를 과시하기도 했다. 최소한 마해영(37, 현 LG 트윈스) 이라는 걸출한 선수가 나타나기 전까지 롯데의 타선을 책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웨이트 트레이닝에 대한 선수들의 인식 부족과 체계적 훈련이 부족하던 시절, 김민호의 타구는 당시 롯데 타자들 중에서 백넘버 17번(김응국)과 더불어 타구의 질이 달랐다는 평을 들었다.
양 방향으로 타구를 보낼 수 있는 컨택 능력은 물론이고 배트 스피드가 따라가는 한 쉽게 물러나지 않는 모습은 1993년을 제외하고는 하위권에 머물고 있던 롯데 타선에 큰 보탬이 됐다.
배트를 지면 방향으로 한번 꺾고, 껌을 씹으며 타석에 들어서던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박정태(38, 롯데자이언츠 코치), 공필성(40, 롯데 자이언츠 코치), 김응국(41, 현대 유니콘즈 코치)과 더불어 사직에 들어서는 상대 편 야수들을 긴장시켰고, 팬들의 기대에 보답하려고 노력했다. 팀 타선 전체 홈런의 절반 가까이 치던 선수가 바로 김민호였다.
그러나 1995년부터가 문제였다. 그의 운동능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노장으로 분류되던 나이는 세대교체의 중심으로 분류되기에 좋은 근거가 되었다. 잇따른 부상과 겨울 훈련 부족은 그의 재기를 늦추는 또 다른 이유가 됐다. 컨택에 초점을 맞추는 스윙은 되지만, 구장을 넘기는 스윙이 점차 힘들어지던 시점이 다가 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련함으로 투수들의 허점을 공략했지만, 점점 그 자리는 마해영이라는 신예에게 넘어가게 됐다. 예전의 김민호와 다른 모습에, 팬들은 백넘버 10번의 선수가 다시 기운을 내기를 바랬고, 기도했다.
그린라이트를 부여받은 선수는 아니었지만, 기본적인 주루센스는 갖춘 선수였다. 자신의 안경을 한 번씩 어루만지며, 보폭을 조절하는 제스추어는 당시 중심타선 치고는 타 팀 투수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기에 충분했다. 중심 타선이지만, 가끔씩 보여주는 재치 있는 주루 플레이는 까다로운 선수로 평가 받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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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롯데에서 원하는 팀 개편안은 마해영 키우기였다. 사직에서 열린 시범경기에서 홈런 타구를 장외로 보낼만한 마해영에게 거는 롯데 구단의 기대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문제는 이 주목받는 신예가 프로에서의 3루 수비를 부담스러워 하여, 자신의 타격에서도 밸런스를 잃었다는 점.
결국 롯데 코칭스태프는 고심 끝에 마해영을 1루로 돌리게 되었고, 롯데의 심장이었던 김민호는 지명타자 내지 벤치를 지키게 되기까지 이른다. 마해영 후폭풍과 노쇠화, 그리고 잦은 부상에 김민호는 1993년에 이어 1995년 다시 한 번 2할 대 초반 타율을 기록하게 된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음은 물론이고, 1996년 결국 1할 7푼의 타율로 그의 선수 생활은 마감하게 됐다.
김민호의 선수 말년에는 슬럼프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그러나 상대 팀 수비진들은 조금 낯선 수비배치를 보이며 김민호의 타구를 어렵지 않게 걷어냈다. 몸의 전반적인 밸런스가 무너지고, 타구 방향이 정해져 버렸다는 증세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그런 약점은 수비수들이 돗자리를 가져온, 소풍 나온 이들로 착각하게 할 만큼 여유로움을 가져다주었다.
결국 해태를 비롯한 당시 일부 팀들이 하향곡선을 그리던 김민호가 타석에 들어서면 2루수는 1루수와 우익수 사이 방향에서 아예 자리를 잡는 경우가 벌어졌다. 몸 쪽에 빠르게 붙이는 공에는 배트 스피드가 따라가지를 못했고, 맞아도, 타격 자체가 극단적으로 잡아당기는 스윙이 나온 시기라, 2루수 앞 땅볼이 되어버렸다.
바깥쪽으로 승부를 거의 걸지 않았다. 어찌 해볼 도리가 없던 시즌이 김민호에게 오고 말았던 것이다. 밤늦게까지 자신의 타격을 수정해보고, 타 팀 투수, 포수, 야수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플레이를 펼쳐보려 했지만, 자갈치는 그렇게 저물었다. 2007년 펠릭스 호세를 두고 얘기가 되는 시프트가, 김민호에게는 1994, 1995년 전성기가 지날 무렵 나타났다.
그리고 2007년, 롯데 자이언츠는 또 한 번 같은 상황을 겪게 된다. 롯데의 중심타자 펠릭스 호세. 호세는 전성기 시절에도 극단적으로 끌어당겨 치는 스윙이 아니라, 빠른 공을 던지는 우완 정통파에게는 대개 당겨 치고, 임창용 같이 빠른 볼을 던지는 투수를 비롯, 대개 아래에서 올라오는 유형의 볼을 던지는 투수들에게는 결대로 밀어치는 타법을 구사했다.
좌완 투수가 나왔을 때는 우타석에서 큰 타구보다는 출루에 신경을 쓴 모습을 팬들은 자주 목격했었다. 호세의 전성기인 1999년과 2001년이 타고투저의 성향이 짙은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만큼 타격부분에서 타율과 홈런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팀의 승리를 이끈 호세는 롯데 팬들에게는 말 그대로 영웅 그 이상이었다.
잠시 한국을 떠나 있기도 했지만, 2006년 한국 프로야구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고, 팬들은 다시금 기대를 했었다. 1999, 2001년 단 두 시즌을 뛰기만 했지만 엄청난 임팩트를 보여준 호세에게 부산의 팬들은 열렬히 환영의 인사를 보냈다.
롯데 팬들은 하나같이, 힘이 되어달라, 예전 마해영과 조경환(35, 현 기아타이거즈)이 당신의 도움을 받았듯이, 이대호가 호세 효과의 대표주자임을 증명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는 이대호 효과를 본 선수는 호세였고, 2007년 시즌을 앞두고 호세는 롯데의 가장 걱정되는 중심타선의 한자리에 들어서는 선수로 분류됐다. 기록상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롯데 팬들의 눈높이도, 1999년, 2001년의 호세였기에 호세의 성적표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2007년 4월 6일 시즌이 시작되었고, 호세는 수원구장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 호세는 전지훈련 막판 아킬레스건 염증으로 조기 귀국해 4주 진단을 받고 서울에서 치료와 재활을 병행해 왔다. 이 때문에 호세는 시범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호세는 상태가 호전되면서 개막전 출전을 위해 스윙훈련에 돌입하는 등 의지를 불태워왔다. 그러나 그가 없는 동안 롯데 타선은 김민호가 1995년 타선에 없을 당시와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매끄럽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이기는 했다.
두산 베어스의 ‘고제트’ 고영민(23)은 호세가 들어서면, 말 그대로 우익수도 아니고, 2루수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서 있으면 됐다. 타법 자체가 김민호의 말년과 비슷하게 끌어 당겨 치는 손목만을 이용한 스윙이 동반되었기에 주자가 있으면 병살로 까지 이어질 수 있는 타구가 양산됐다.
두산만 이런 시프트를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 삼성 라이온즈 모두 호세 시프트를 사용했다. 어떻게든 살아나갔던 출루 제조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삼성의 양준혁이 루상에 다리를 힘껏 지면으로 내차며 달리는 것처럼, 호세 또한 죽을힘을 다하는 모습은 팬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그러나 야수들의 글러브 안에 있는 공들의 생명력은 호세의 주루를 방해했다. 1996년의 김민호가 그랬던 것처럼, 호세의 라커는 다른 이름이 채워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호세의 빈자리를 메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김승관(31)은 말 그대로 2군에서 ‘배리본즈’였지만, 1군에서는 ‘김승관’이었다. 그러나 2006년과 달리 카드가 한 가지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김민호의 대안은 마해영 한 명이었지만, 호세의 대안 카드가 팀 내에서도 충분히 존재했다. 박현승(35), 정보명(27), 이승화(25) 그리고 이원석(21)은 2007년 호세 한 명 이상의 효과를 냈다. 2007년 5월 10일 문학구장에서 마수걸이 홈런으로 자신의 건재를 알리지만, 김민호와 같은 수순을 밟고 있었다.
야구는 투수놀음이다. 그러나 그런 상식을 깨트려준 선수가 바로 롯데 자이언츠의 호세였다. 그가 처음 왔을 때부터 호세가 2007년 시즌이 오기 전까지 대부분의 부산 팬들은 그를 용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호세의 실력이 탁월했기에, 롯데 팬들이 아끼는 것도 있었지만, 호세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무언가가 항상 있었다.
강병철 감독 입장에서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투수 위주 운영으로 팀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타력을 보강해서 승부수를 띄울 것인가 2007년 시즌의 운명이 바뀔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장기적인 팀 운영을 감안해본다면, 이대호를 받치는 타선이 있어야 함은 당연했다. 그런 측면에서 거포형 외국인 선수를 영입해야 한다는 팬들의 목소리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한 팀의 중심 타선이 시즌 중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을 때 팀을 운영하기란 쉽지가 않았기에 코칭 스태프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것도 8위 자리에서 ‘마이 묵었다.’는 롯데의 기존 전력으로 치고 올라가기 위해서는 분명 호세처럼 계기를 반전 시켜줄만한 카드는 참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자리에는 에듀아르도 리오스(34)를 비롯한 정보명, 이승화, 이원석, 박현승 같은 이들이 자리 잡고 있다. 한방으로 팀을 가져가기 보다는 패를 다양하게 가지고 가면서 팀 타선의 융화를 도모하는 방향으로 정했다. 1992년 기관총 타선으로 리그를 우승 시키던 것과 흡사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이다.
호세가 당장 부활을 하던가, 롯데 자체적으로 무언가 해결 방안을 찾아야 했지만, 롯데는 제 3의 방법을 택했다. 2006년 5월에 롯데는 팬들이 선수들 차를 가로 막으며 속상해하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6월은 팬들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시간이었다. 시즌 중 가장 낮은 순위까지 내려가던 롯데 자이언츠. 강병철 감독의 2007년 승부수가 맞아 떨어지는지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