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들의 친구,야구] 김병현 '허허실실' 피칭 빛났다

by한들 기자
2007.05.29 17:33:01

TNT 아닌 벽돌빼기로 컵스의 성 함락

[로스앤젤레스=이데일리 SPN 한들 통신원]

여기 함락시켜야 할 성(城)이 있습니다. 대포 한방으로 폭파시킬 수 없다면 방법은 무엇일까요? 야금야금 무너트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김병현이 29일(이하 한국 시간) 시카고 컵스전서 6이닝 3피안타 5탈삼진 무실점 쾌투로 3승을 따냈습니다. 그 비결도 폭발력 있는 TNT가 아니었습니다 . 벽돌을 한장 한장 빼서 허물어 트리는 것, '허허실실(虛虛實實)'이었습니다.

김병현의 벽돌 빼기는 절묘한 코너워크로 시작됐습니다. 최근 빛을 발하고 있는 오른쪽 타자 몸쪽으로 휘어져 들어가는 90~91마일의 '투심성' 패스트볼을 비롯해 80마일대 초반의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75마일 전후의 커브가 스트라이크존 외곽에 공 1개 차로 걸치며 타자들을 꼼짝없이 만들거나, 헛스윙 또는 범타를 이끌어 냈습니다.

특히 상위 타선과의 대결에서 코너워크는 말 그대로 핀 포인트 컨트롤, '송곳'이었습니다. 1회 1사 1루서 3번 타자 데릭 리를 볼카운트 2-2서 90마일 몸쪽 꽉찬 투심성 패스트볼로 루킹 삼진을 솎아냈습니다.

4회 1사 후 5번 타자 마이클 바렛을 루킹 3구 삼진으로 잡아낸 것도 91마일 같은 공이었고, 5회 1사 후 톱타자 알폰소 소리아노의 방망이를 쪼개 트리며 3루 앞 땅볼로 유도한 것도 89마일 꼬리가 붙은 것처럼 계속 꿈틀대며 들어간다는 테일링 패스트볼(투심 패스트볼의 다른 이름), 그 공이었습니다.

코너워크와 함께 벽돌을 차곡차곡 쌓이게 한 것은 영리한 볼배합과 완급 조절이었습니다. 2회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으로 3자 범퇴시키는 등 3회까지 변화구를 결정구로 많이 썼던 김병현은 4회부터 6회까지 과감하게 패스트볼로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그 때문에 컵스 타자들이 넋 놓고 삼진을 당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나왔습니다. 앞서 말한 4회 1사 후 바렛의 루킹 3구 삼진도 그랬지만 계속된 2사 1, 2 루서 8번 라이언 데리엇이 볼카운트 2-1서 한복판 패스트볼에 얼어붙은 듯 삼진을 당한 것은 김병현의 볼배합을 전혀 못 읽은 결과였습니다.



하일라이트는 뭐니뭐니 해도 컵스에서 득점권 타율이 가장 높은 강타자 리와의 세 차례 대결이었습니다.

김병현은 3 회 2사 1, 3루서 리와 다시 맞닥뜨렸습니다. 첫 타석에서 루킹 삼진을 당한 탓에 패스트볼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리는 원투에서 89마일 패스트볼이 들어오자 볼을 골라 냈습니다. 이어 다시 똑같은 공이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 방망이가 나갔지만 파울볼이 됐습니다.

그러자 김병현은 풀카운트서 바깥쪽으로 달아나는 82마일 슬라이더로 리의 헛스윙을 유도, 마운드에서 '주먹 펌프질'을 하며 환호작약했습 니다. 스스로도 분수령을 넘겼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습니다.

5회 2사 1루서 리를 다시 만난 김병현은 이전 타석과 또 다르게 던졌습 니다. 이번엔 89마일 패스트볼(파울)에 이어 91마일 바깥쪽 패스트볼을 구사해 빗맞은 우익수 파울 플라이를 끌어냈습니다. 리에게 거둔 3연승은 무실점 쾌투의 출발이자 끝이었습니다.

이날 5삼진 중 루킹 삼진이 3개였습니다. 김병현의 절묘한 코너워크, 패스트볼과 변화구를 넘나드는 볼 배합과 완급 조절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방증입니다.

김병현에겐 여전히 아쉬운 게 있었습니 다. 투구수 80개, 이닝으로는 4회를 넘기면서 다소 지친 기색을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앞서 두 경기도 모두 5.1이닝에 그쳤습니다.

이날도 6회 선두 타자에게 처음으로 안타를 맞은 후 컵스 벤치의 성급한 작전(볼카운트 2-1서 히트앤드런을 구사했다가 바렛이 슬라이더를 맞추는데 급급해 2루 직선 타구로 잡히며 병살)에 편승해 마지막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5월19일 플로리다 이적 후 비로소 시즌 개막을 한 것이나 다름없어 힘에 부치는 것 같습니다. 이유가 어쨌든 김병현으로선 꾸준함을 유지하기 위해선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하지만 김병현은 이런 아쉬움을 상쇄시키고도 남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이전 필라델피아전에서 노출시켰던 '기분과 힘'을 앞세운 예전의 정면승부가 아닌, 피해가는 듯하지만 결코 피해가는 것이 아닌, 허허실실 승부의 미학에 한 발짝 더 다가서는 '요령 피칭'으로의 변신입니다. 변신의 닻을 올린 김병현의 다음 항해가 더욱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