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중 탁구부'도 6명인데…5명으로 '전국 3강'
by노컷뉴스 기자
2008.04.17 12:13:40
[노컷뉴스 제공] ]“똑딱, 똑딱…” “어이, 어이!”
수원 화홍고등학교(교장·최윤기) 실내 체육관에는 계란 같은 공이 정신없이 튀어 다니고 공을 라켓으로 받아칠 때마다 외치는 가늘고 맑은 파이팅이 가득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대회에서 현정화가 중국 상대 선수와의 접전에서 점수 올릴 때마다 외치던 “화이팅!….” 하는 가냘픈 외침이 문득 떠오른다.
88올림픽 이후 우리나라 탁구는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유승민이 남자단식 금메달 쾌거를 이루며 비인기 종목인 탁구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수원 고등부에서 하나뿐인 화홍고등학교 탁구부는 각종 대회나 언론으로부터 그다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유승민’ 같은 걸출한 에이스가 없기 때문이다.
화홍고 탁구부는 2003년 창단해서 2년 전 전국대회 우승을 한 적도 있지만 그때 우승을 이끌었던 에이스들이 모두 졸업을 하고 지금은 고작 5명의 부원만이 남아 있다.
5명의 탁구부원…. 탁구 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최소 정예 부원이다. 누구 한명이라도 부상을 입거나 운동을 그만두면 팀은 해체될 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일본 엽기탁구만화 ‘이나중 탁구부’의 부원도 하물며 6명이었다.
어떤 종목의 스포츠건 에이스가 팀을 이끌어 가기 마련이건만 화홍고 탁구부는 모두 고만고만한 5명의 선수들이 팀을 이끌어 갈 뿐이다. 에이스도 없는 최소 인원의 화홍고 탁구부.
그래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차지하고라도 전국대회에서도 어느 누구 하나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올 3월에 있었던 전국중고학생종별탁구대회에서 이들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전국대회 3위에 오른 것이다. 모두들 이들이 입상은커녕 8강조차 들지 못할 거라 예상했었다.
“재웅이 형의 예선리그 마지막게임이었어요. 그 형이 지면 우린 그냥 끝나는 거였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형이 2-0으로 지고 있는 거예요. 우린 포기하고 짐 싸고 있었죠.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어요~ 재웅이 형이 3-2로 역전을 한 거예요!”
그 날의 기적 같은 역전승의 기쁨이 되살아난 듯 막내 중민과 규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예선리그 마지막게임, 재웅이의 짜릿한 역전승으로 자칫 쓸쓸히 돌아서야했던 발걸음을 되돌릴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여세를 몰아 8강 토너먼트까지 오르고 예선전에서 졌던 팀에게 이기는 등 파죽지세로 3위에까지 올랐다. 대회 관계자들 모두 입을 딱 벌렸다.
특출난 에이스도 없이, 예비부원도 없이, 오로지 최소 정예 멤버 5인의 탁구부원이 이룬 이날의 쾌거는 비인기 종목으로 설움 아닌 설움을 받던 수원 탁구의 자존심을 살렸다.그 날의 주인공 재웅이는 쑥스러운 듯 귓불이 닳아 오른다.
“열심히 했는데 2-0으로 지더라구요. 힘도 빠지고 그래서 그냥 포기했죠. 그런데 이상한 게 마음 비우고 편하게 하니까 잘 되는 거예요. 작은 탁구공이 야구공 만하게 보이고 상대 탁구대가 커 보여 웬만하면 다 들어가더라고요.” 거 참, 마음 비운다고 다 잘되진 않을 텐데, 무슨 비법이라도? 올해 초부터 이들의 탁구 코치를 맡고 있는 김정수(33) 코치는 운이 좋았다며 겸손하게 말한다.
“그 날, 역전승이 많았어요. 재웅이 경기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 경기도 역전극이 많이 일어났어요. 운이 많이 따른 거죠.”
하지만 경기든 인생이든 역전이라는 것이 과연 쉬운 것만은 아닐 텐데, 분명 운만 따라서 되는 일은 아닐 텐데, 그만한 노력과 팀워크가 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화홍고 탁구부원들은 극도의 긴장감이 감도는 경기에서도 웃는다. 어차피 하는 것, 즐기며 하라는 김 코치의 가르침 덕이다.
김 코치도 수원 경기대 출신이라 수원 탁구계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올해 초 화홍고 코치로 오기 전 동인천고에서 탁구부 코치를 했다. 그의 실력은 세계 청소년주니어대회 1등을 한 그의 제자 정상은이 말해준다.
“중학교 때까지는 스파르타식의 운동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 코치님은 무서울 땐 무섭지만 재밌게 운동하고 즐기며 운동하라고 하세요. 그래서 경기장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편해서 실력 발휘가 제대로 된 것 같아요.”
최고참 동희의 나름 평이다.
부모님 권유로, 친구 따라, 특별활동하다 입문하게 된 탁구인생. 처음엔 참 재미있었단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세상이 재미만 있지는 않는 법. 앳된 얼굴의 팀 막내 중민이는 힘들었었던 시절을 떠올린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친구들과 놀고 싶고 평범하게 공부하고 싶어 체육관 가기 참 싫었어요. 하지만 고등학생 되니까 놀고 싶은 생각에 힘든 건 없어졌는데 연습해도 실력이 늘지 않을 때는 정말 힘들어요. 잘 하고 싶은데….”
막내가 철이 들었나보다.
이들의 지금 가장 큰 고민과 바람은 당장 오는 5월 5일 춘천에서 있을 ‘KRA컵 제54회 전국남녀종별탁구선수권대회’의 선전이다. 초중고, 대학, 실업, 모두가 모이는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국대회라 기량을 보이면 진로에 유리하다.
하지만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에이스들이 다 모이는데 그 자리에서 뛰어나 보이기가 얼마나 어려울지는 상상이 된다. 어쨌든 그 가운데에서 기죽지 않고 좋은 성적을 내려면 탁구를 즐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할 터. 피나는 노력과 연습은 당연 기본이다.
비록 에이스는 없지만, 비인기 종목이라는 설움 속에 있지만 화홍고 탁구부는 웃는다. 개인의 뛰어난 기량보다 잘 어우러지는 팀워크가 중요하다는 걸아니까. 억지로가 아닌 내가 좋아 하는 탁구이기에, 어차피 갈 길 즐겁게 가야는 게 현명하다는 걸 알기에 웃는다. 지금 가장 갖고 싶은 것이 뭐냐는 질문에 “여자 친구요~”라고 말하는 순수한 우리 화홍고 탁구부원들, 오는 5월의 전국대회에서 또 다시 좋은 기량을 선보여 3월의 역전이 우연이나 기적이 아닌 실력이라는 걸 보여주길….
또 하나, 오는 8월에 있을 베이징올림픽 대회에서 예전 현정화, 유남규, 유승민 때처럼 탁구가 금메달 사냥을 하며 국민의 사랑을 얻어 탁구의 전성기를 구가하길, 간절히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