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키우며 글 공부까지…, 68세 할머니의 지칠 줄 모르는 힘에 덩달아 기운이"[인터뷰]
by박미애 기자
2021.10.19 10:06:07
다큐멘터리 '한창나이 선녀님' 원호연 감독
늦은 나이에 배움의 길에 들어선 강원도 산골 할머니 통해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 응원
DMZ영화제 관객상 수상…20일 개봉
| 다큐멘터리 영화 ‘한창나이 선녀님’ 원호연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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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스타in 박미애 기자] “다큐멘터리는 ‘제로’(0)에서 시작합니다. 시나리오도 없고,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어서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죠.”
2012년 영화 ‘강선장’을 시작으로 10여년 간 한 우물을 파고 있는 원호연 감독이 다큐멘터리 작업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세 번째 다큐멘터리 영화 ‘한창나이 선녀님’의 개봉을 앞두고 만난 원호연 감독은 “그 과정이 힘든데 평범했던 장면들이 특별한 의미로 와닿는 순간이 있다”며 다큐멘터의 매력을 짚으며 “(임)선녀 어머님의 이야기가 그랬다”고 얘기했다.
‘한창나이 선녀님’은 글공부를 통해 꿈을 향해 한발한발 나아가는 68세 임선녀 할머니의 일상을 담은 휴먼 다큐멘터리로 오는 20일 개봉을 앞뒀다.
원 감독은 몇 년 전 한 방송에서 늦은 나이에 한글을 배우며 좋아하는 할머니의 인터뷰에 마음이 동해 이번 영화의 작업에 착수했다. 강원도 지역의 성인 문해 교육 현장을 찾아다니며 임선녀 할머니를 만나기까지 1년 6개월, 촬영하는데 1년 6개월, 그렇게 총 4년의 시간을 공들인 뒤에야 ‘한창나이 선녀님’이 나올 수 있었다.
“문해 교육 수업에 가보면 대부분이 어머님들입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탓도 있지만, 과거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글을 배우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죠. 선녀 어머님은 남편의 유언에 따라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해요. 남편 없이 글을 모른 채 사는 것이 무서웠다는 어머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글을 안다는 것, 배운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원 감독은 할머니 집 근처에 숙소를 잡고 한 달의 보름 정도 시간을 촬영에 매달렸다. 아침이 밝으면 할머니 집으로 가 함께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며 할머니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임선녀 할머니의 글공부 프로젝트로 시작했지만, 인적 드문 산골 마을에서 혼자서 낮에는 소 키우고 농사를 지으며 밤에는 글공부로 하루를 충실히 보내는 할머니의 무한 에너지에 매료됐다.
| ‘한창나이 선녀님’은 68세 나이에 한글을 배우며 꿈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한 임선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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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 어머님은 처음부터 다른 어머님들과 달랐어요. 보통 어머님들은 영화를 찍겠다고 하면 겁부터 냅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계속 옆에 있으면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 겁니다. 영화가 뭔지부터 설명해야 할 때도 있죠. 선녀 어머님도 살면서 딱 두 번 영화를 봤는데 긴 설득이 필요 없이 얘기를 듣고는 쿨하게 오케이 하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어머님께 느껴지는 특별함이 있었어요.”
다큐멘터리는, 있는 그대로를 카메라에 담아내면 될 것 같지만 감독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 고난도의 즉흥적인 작업이다. 사건이 아닌 사람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는 자칫 단조롭고 심심할 수 있어서 특히나 감독의 순발력이 요구된다.
“저 역시 작업을 할 때마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끝맺게 될까, 끝을 맺을 수는 있을까 늘 불안한데 ‘한창나이 선녀님’은 어머님이 글을 배운 뒤로 새집을 짓고 기르던 소를 팔고 하는 의도치 않았던 순간들이 더해져서 지금의 이야기로 완성됐습니다. 어머님에게 글을 배운다는 건 꿈도 꿈이지만, 자신의 인생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찍고 나서 보니 ‘아 이게 이런 이야기였구나’라고 의미를 찾을 수 있었죠.”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임선녀 할머니의 일상을 보다 보면 덩달아 힘을 받게 된다. 팍팍한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무기력한 이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묵묵히 행동으로 전한다.
“스스로에 대해서 힘든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어요. 딴에는 열심히 영화를 만들었는데 개봉을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 거기서 오는 고민이 많았죠. 그때 선녀 어머님을 만났는데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매순간을 치열하게 사는 거예요. 힘들어하는 기색도 없어요. 그런 어머님을 옆에서 지켜보며 제가 더 많은 힘을 얻었어요. 이 영화를 보시는 분들도 조금이나마 그런 힘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