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 열풍!]⑥박상철 사례로 본 `오디션★ 희로애락`
by최은영 기자
2011.06.01 10:47:37
[이데일리 스타in 최은영 기자]대한민국은 지금 `오디션 열풍`에 휩싸였다. 가수 오디션인 Mnet `슈퍼스타K 2`와 MBC `위대한 탄생`이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이후 오디션 프로그램은 아나운서, 연기자 등으로 다양화하고 있다. 이데일리는 SPN 창간 4주년을 맞아 `스타in`으로 제호를 변경하며 특별기획으로 `오디션 열풍`을 집중 조명해 본다.[편집자]
`노래하는 미용사, 지역 축제 거쳐 전국구 스타로···`
오디션으로 인생 역전을 이룬 이들은 기존 연예판에도 있다. `전국노래자랑`이 낳은 가수 박상철에 `99%의 도전`이 발굴한 문화 영재 조권(2AM)·선예(원더걸스), KBS `슈퍼탤런트 선발대회` 출신 송윤아, 차태현, 박상아 등이 대표적이다.
그중에서도 박상철의 성공 사례는 요즘 우리 시대 오디션 스타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모두 담겨 눈길을 끈다.
박상철은 1990년대 허각, 백청강이었다.
그는 강원도 삼척시 작은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소년의 꿈은 가수였다. 하지만 줄 없고, 빽 없고, 돈은 더더욱 없었던 시골 청년에게 가수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였다. 가족들 몰래 기차를 따고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모 작곡가 사무실. 그곳에서 처음 오디션이라는 걸 봤는데 시작은 순조로웠다. 아니 그런 듯 했다.
"노래 실력은 충분하다는데 문제는 돈이었어요. 음반을 취입하려면 1000만원 정도가 든다더군요.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시작했고 잠은 아파트 계단에서 자며 정말 악착같이 돈을 모았어요. 그렇게 꿈에 그리던 돈을 거머줬는데 그 사람(작곡가)은 몇달이 지나도록 음반을 내주지 않았어요. 참다 못해 따져 물으니 되려 절 호통치더군요. `그간의 노래 수업료만 따져도 얼만데` 라면서요. 사기를 당한 거예요"
당시 그가 겪은 일화는 최근 오디션 붐을 타고 난립하고 있는 학원형 기획사과 가짜 매니저의 횡포 등을 떠올리게 한다.
박상철은 자포자기했다. 일생 일대, 최악의 고비였다. 무엇보다 거짓된 세상을 향한 분노를 풀 길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 거리로 내몰렸고 노숙자로 수개월을 생각없이 지냈다. 당시엔 `그 놈의 꿈` 때문에 망가진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같았다. `가수 박상철`. 무대에서 노래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미용실이었다. 명동거리를 지나는데 미용실을 가득 메운 여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 미용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던 때였다. 박상철은 미용 기술을 익히며 재기를 시도했고, 결국 헤어 디자이너로 남보다 빨리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다시 고향 삼척으로 내려가 직접 미용실을 차렸다. 그의 미용실에는 특이하게도 개인 노래방 기계가 있었다. 그는 손님들의 머리를 만지며 서비스로 노래를 불러줬다. `노래하는 미용사`. 특이하면서도 친근한 애칭은 그때 생겨났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건 1993년 6월이었다. `전국노래자랑`이 삼척에서 열린다는 소리에 바로 응모를 했고, 유열의 `화려한 날은 가고`로 당당히 최우수 가수상을 수상했다.
`전국노래자랑`의 영향력은 비록 해당 지역에 국한되긴 했어도 실로 대단했다. 수상 직후부터 가수로 대접을 톡톡히 받았다. 그는 "비록 향토가수지만 당시 삼척을 비롯한 강원도 내에서의 인기는 `슈퍼스타K2` 허각, `위대한 탄생` 백청강 부럽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것은 분명 기회였다. 하지만 끝이 아닌 시작임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전국노래자랑` 팀을 쫓아다녔어요. 담당 PD에게 가수가 되는 길을 알려달라고 사정하며 매달렸죠. 사람들은 절더러 미쳤다고들 했어요. `전국노래자랑`이 지역 축제이지 가수를 발굴하는 대회가 아니지 않느냐며 비아냥거렸죠. `포기하는 게 나을 거다` 말한 사람도 있어요. 그래도 나중에는 제가 불쌍해보였나봐요. 한 분이 작곡가 박현진 씨를 소개해주셨거든요."
박현진은 `네박자` `있을 때 잘해` `야간열차` 등을 작곡한 트로트계 히트 메이커였다. 그렇게 가요계 확실한 연줄을 잡은 그는 `자옥아` `무조건` `황진이` 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데뷔는 서두르지 않았다. 2000년 `부메랑`이 시작이었으니 정식 데뷔까지는 그로부터 또 7년이 걸린 셈이다. 이번에는 음반을 내자는 작곡가의 제의를 `아직은 때가 안됐다`며 그가 먼저 뿌리쳤다.
"제가 음반을 준비하던 당시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가요계가 온통 댄스 일색이었요. 그 상황에 제가 설 자리는 없다고 판단했죠. 그렇다고 시류에 무작정 편승해 댄스 가수로 나서는 것도 답은 아니라고 봤어요. 제가 정한 분야에서 개척자가 되길 바랐는데 그 판단은 지금도 옳았다고 봐요"
박상철은 가수 지망생 시절 사기로 경험한 쓴맛과 최고 가수왕에 등극하며 무대에서 맛본 단맛이 고르게 섞여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고 말한다.
가진 게 없어 절박했기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고 꿈이 있어 고삐를 더욱 바짝 쥘 수 있었다. 가난과 실패가 채찍이라면 꿈과 무대는 당근이 된 셈이다.
그는 또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우승을 했다고 하더라도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된양 자만해선 안된다는 이야기도 했다. 보통사람에게 오디션은 분명한 기회지만, 그것이 곧 성공을 일컫는 건 아니라는 소리다.
이같은 사실은 여러 오디션 스타들의 사례에서도 익히 확인된 바 있다. SBS 영재육성 프로젝트 `99%의 도전`을 통해 JYP 사단에 합류한 선예와 조권도 각각 6년과 7년의 혹독한 연습생 기간을 거쳐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깝권` 조권은 지난해 발간된 MBC `세상을 바꾸는 퀴즈` 관련 책에서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만 하면, 최종까지 살아남으면 모든 게 탄탄대로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기회 역시 준비된 자만의 것이라며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고 조언했다. 여기에 자신만의 개성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그가 고루한 트로트에 록적인 샤우트 창법을 섞어 기존 성인가요 시장에 바람을 일으켰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