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들의 친구, 야구] 백차승 변화구 '마냥 장날 일 수 없다'

by한들 기자
2007.05.22 16:57:04

패스트볼 씨앗 먼저 뿌려야 변화구 꽃도 피어나 <클리블랜드전 관전평>

▲ 백차승 [로이터/뉴시스]



[로스앤젤레스=이데일리 SPN 한들 통신원] 인식론적으로 봤을 때 타자에게 변화구와 패스트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알면 칠 수 있는 게 변화구라면, 뻔히 알면서도 눈뜨고 당하는 게 패스트볼입니다. 그만큼 변화구 승부는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 빠르고 볼 끝이 살아 들어오는 패스트볼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위력을 자랑합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동대문구장에서 고교. 대학생 투수들을 향해 연신 스피드건을 쏘아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투수의 기본기이면서 가장 확실한 무기인 패스트볼을 얼마나 빠르게 던질 수 있느냐, 바로 그것을 재는 것입니다. 투수란, 패스트볼이란 '씨앗'으로 싹을 틔워 변화구란 '잎'을 달고 요령이란 '가지'를 뻗으면서 자라나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각설하고.

22일(한국시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전서 백차승(시애틀 매니러스)이 잘 던지다 7회 1사 후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진 것도 변화구와 패스트볼의 가치를 시금석으로 보여준 한판이었습니다.

올 시즌 다양한 변화구와 자로 잰 듯한 컨트롤로 주가를 단숨에 끌어올린 백차승. 이날도 1회부터 변화구 예고편을 써 내려갔습니다. 선두 그래디 사이즈 모어에게 89마일 투심 패스트볼로 우익선상 2루타를 맞자 슬라이더,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70 마일대 느린 커브로 가볍게 투아웃을 잡더니 4번 빅터 마르티네스에게도 원투서 78마일 체인지업으로 우전 적시타를 허용, 첫 실점을 했습니다.

하지만 백차승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변화구 승부였습니다. 2회 다시 커브로 선두 타자에게 자신의 글러브를 맞고 유격수 쪽으로 굴러가는 내야 안타로 계속된 1사 1루.

8번 라이언 가코에게 스리볼에 몰린 백차승은 89마일 투심 패스트볼로 첫 스트라이크를 잡은 뒤 내리 86마일 백도어 슬라이더를 거푸 몸 쪽에 던져 루킹, 헛스윙 스트라이크를 차례로 꽂고 첫 삼진을 잡아냅니다. 이어 포수 조지마 겐지의 2루 호송구가 나와 가볍게 이닝을 마쳤습니다.

클리블랜드 타자들도 백차승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었는지 철저히 변화구를 노리고 들어왔으나 좀처럼 공략의 돌파구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이날 백차승의 변화구는 손에 긁힌 '장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 카드를 훤히 알고 치는 도박처럼 쉬운 일도 없습니다. 백차승의 정체를 완전히 파악한 클리블랜드의 강타선은 3회부터 변화구를 집요하게 추궁하기 시작했습니다. 9번 자시 바필드가 10구, 사이즈모어는 무려 12구까지 가는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비록 삼진과 투수 땅볼, 우익수 플라이(2번 케이시 블레이크)로 삼자범퇴를 시켰지만 백차승은 3회에만 1, 2회를 합친 것보다 2개가 더 많은 26개의 공을 던져야 했습니다. 뻔히 읽히는 변화구 승부의 어려움을 알려주는 또 다른 예고편이었습니다.

하지만 백차승의 '긁히는' 변화구는 갈수록 빛을 발했습니다. 4회, 5회까지 내리 삼자범퇴. 카드를 보여준 거나 다름없는 만큼 상대방도 그만큼 쉽게 베팅을 해온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6회 들어서도 선두 바필드를 85마일 슬라이더로 2구만에 투수 땅볼, 이날 가장 자신을 괴롭혔던 톱타자 사이즈모어를 7구까지 가는 접전 끝에 85마일 체인지업으로 헛스윙 삼진으로 솎아내 13타자 연속 퍼펙트.

그러나 백차승의 장날은 이때부터 먹구름이 끼기 시작 했습니다. 문제의 2번 타자 블레이크와의 대결. 볼카운트 2-2서 던진 81마일 슬라이더가 바깥쪽 밋밋하게 높이 걸치면서 블레이크의 방망이에 제대로 걸리고 말았습니다. 큼지막한 좌중월 홈런.

클리블랜드의 에이스이자 빅리그 최정상급 좌완 C.C 수바시아와 팽팽한 투수전을 벌이고, 5회를 마친 후 그로 하여금 먼저 타월을 던지게 했건만....

결국 이 홈런으로 1-1의 균형은 깨졌고 백차승은 투구수가 91개를 넘긴 7회 그로기 상태로 빠져듭니다.

선두 두 타자에게 거푸 안타를 맞고 7번 데이빗 델루치에겐 투 나싱을 먼저 만들어 놓고도 체인지업 컨트롤이 한계를 드러내며 볼 4개를 내리 던져 무사 만루. 8번 가코를 88마일 슬라이더로 이날 마지막 6번째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냈지만 바필드에게 초구에 어설프게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들어가는 91마일 바깥쪽 높은 패스트볼로 좌측 펜스를 직접 맞는 2타점 2루타를 허용, 끝내 강판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투구수 108개에 6.1이닝 홈런 1개 포함 8피안타 5실점(자책), 1볼넷을 기록하며 2패째.

패스트볼이 뒷받침되지 않는 변화구 일변도 승부의 허무한 끝을 여실히 보여준 게 이날 백차승의 피칭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제 6경기 째 등판하면서 소문이 쫙 퍼져 그동안 낯선 '초면 효과'를 톡톡히 누렸던 백차승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기도 합니다.

사실 백차승이 데뷔 첫 완투승 등 올 시즌 만개한데는 더욱 정교해지고 가지수가 늘어난 변화구의 성장도 있었지만 지난해보다 부쩍 좋아진 패스트볼이 '바늘 가는데 실'처럼 따라와 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날 클리블랜드전서 백차승은 70% 이상을 변화구로 던지고 패스트볼도 변화구에 가까운 싱커나 투심에 의존했고 위력도 이전 같지 않았습니다. 마치 지난해의 흐느적거리는 투구 폼에서 흐느적거리며 들어오는 패스트볼을 보는 듯했습니다.

백차승이 승리를 챙길 수 있는 투수가 되려면 결국 다시 패스트볼의 씨앗을 뿌리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정교하기 이를 데 없고 가지 수도 많은 변화구의 꽃도 화려하게 피어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