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바라보는 극과 극의 시선

by조선일보 기자
2008.10.24 10:19:08

아내가 결혼했다, 그 남자의 책 198쪽

[조선일보 제공] 전복(顚覆)적인 결혼과 담백(淡白)한 연애. 이번 주 조선일보 영화팀의 선택은 서로 다른 체온을 지닌 두 편의 로맨스다. 어제(23일) 개봉한 '아내가 결혼했다'와 '그 남자의 책 198쪽'. 공교롭게도 소설이 원작이라는 교집합을 가지고 있지만, 사랑을 바라보는 시선은 천양지차다. 사랑이라도 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이 가을, 당신의 선택은.

▲ 아내가 결혼했다




논란과 화제의 강도만으로 승부하자면 이번 주의 승자는 단연 '아내가 결혼했다'일 것이다. 나랑 결혼한 아내가 동시에 다른 남자랑 한번 더 결혼하겠다니,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궤변인가. 2년 전 세계문학상을 받았던 박현욱의 동명 장편소설을 정윤수 감독이 스크린으로 옮긴 이 흥미로운 로맨스는 얼핏 현대 여성들의 도발적 판타지로 보인다. 거칠게 요약하면 축첩(蓄妾)이 남자만의 전유물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용감한 텍스트를 읽는 비판적 독법도 가능하다. 남성들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수난사이고, 여성 입장에서도 잔혹사의 가능성이 물씬 풍긴다.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남편은 아내가 다른 사내와 잠을 자더라도 꿋꿋하게 견뎌야 하고, 태어난 딸내미의 진짜 아빠를 의심하며 남몰래 눈물 흘린다. 아내도 마찬가지. "사랑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인도주의적' 세계관으로 두 남자와 결혼하지만, 남편은 물론 시댁에까지 잘하겠다는 일념으로 두 집 제사를 모두 챙기며 온몸이 부서져라 일한다. 이쯤 되면 소설의 '아내' 인아가 보여줬던 결혼제도의 근원적 반성과 전복성은 휘발하고, 특출한 외모와 거부하기 힘든 귀여움만을 간직한 영화 속 아내만 살아남는 것이다.

이런 주제상의 아쉬움을 채워 주는 건 두 주연 배우의 빼어난 연기다. 목젖이 보일 만큼 작정하고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뿜어내는 아내 손예진도 물론 사랑스럽지만, 분노와 체념 그리고 자기 합리화 사이를 왕복하며 아내의 결혼을 온 몸으로 견뎌내는 소심한 남편 김주혁의 연기는 이 영화의 캐스팅에 쏟아진 충무로의 기대와 칭찬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분명하게 입증한다.








주변 총각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프로그래머 주인아(손예진). 족탈불급(足脫不及)의 미모에 재능까지 갖췄는데, 축구 지식까지 해박하다. 소심한 샐러리맨 노덕훈(김주혁)은 인아가 자신과 결혼해 준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 여자, 또 한 번 결혼을 하겠단다. 사랑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면서.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가 아니라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의 시작.





 
 
▲ 그 남자의 책 198쪽




같은 날 개봉하는 덩치 큰 영화들에 비해 '그 남자의 책 198쪽'은 조금 왜소해 보인다. 해질녘 노을처럼 이 장르 특유의 관습적 장면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도 약점이다. 하지만 이 단정한 멜로드라마에는 고전적 로맨스가 지닌 느긋한 기품이 있다. 소설가 윤성희의 동명 단편소설을 시나리오 작가 나현('화려한 휴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각색한 이 말쑥한 로맨스는 맑은 술을 마셨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산뜻함이 있다. 이 영화가 내미는 따뜻한 손길에는 지나친 자극도, 감정의 과잉도 없다. 그런 조미료의 부재 때문에 관심을 접을 성마른 관객도 있겠지만, 자극적 멜로의 홍수에 피로를 느꼈던 당신이라면 오히려 이 영화의 동양화적 여백이 반가울 것이다.

'그 남자의 책 198쪽'을 이끌고 가는 중심 이야기는 그 남자가 도서관에서 왜 모든 책의 198쪽만 골라 찢느냐는 것. 그리고 그 남자의 비밀과 상처는 무엇이냐는 것. 어쩌면 시대착오라고도 여길 수 있는 활자 지향 스토리지만 김정권 감독은 이를 미스터리 형식으로 풀어내며 호기심을 자아낸다. 직설적 고백이 아니라 쪽지를 통해 마음을 전달하는 연애의 매력. 감정과 신체를 송두리째 드러내기보다 상대방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는 장면만으로도 더 큰 감정의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윽박지르지 않고 증명한다.

이 영화를 보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이동욱과 유진 연기의 성실함이다. 절대평가의 잣대로 보면 아쉬움이 남지만, 음악에 뿌리를 둔 연기자들에 대한 편견을 씻기에 충분할 만큼 호연했다. 어딘가 나사 하나가 풀린 듯 느슨한 모습의 이동욱과 끝까지 자신의 상처를 숨기고 호기심과 연민으로 그를 어루만지는 유진의 연기를 주목해 보시기를.


시골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왈가닥 은수(유진)는 책 도둑이라고 의심하고 한 사내를 두들겨 팬다. 하지만 이 남자 준오(이동욱), 사연이 있다. 훔치는 게 아니라 도서관에 있는 책들의 198쪽만 몰래 찢고 있었던 것. 헤어진 여자 친구가 마지막으로 남긴 쪽지에 "○○책 198쪽에 내 마음이 담겨있다"라고 적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책 이름이 해당하는 부분이 지워졌다는 것. 준오의 책 찾기를 도와주다가 은수는 그의 비밀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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