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확대경]피할 수 없는 엔터의 서열화

by김은구 기자
2016.05.31 07:00:00

한 인터넷 게시물에서 드라마 작가 중 ‘톱 오브 톱’ 중 한명으로 꼽힌 ‘태양의 후예’ 김은숙 작가(사진=이데일리DB)
[이데일리 스타in 김은구 기자] “창작의 직업까지 서열을 정하려는 이 사회. 이런 거 공유하지 말아줘요.”

최근 기자가 SNS에 공유한 게시물에 한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가 올린 댓글이다. ‘한국 드라마 작가 서열’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인기 드라마 작가 35명(팀)을 서열화한 게시물이었다. ‘태양의 후예’ 김은숙 작사를 비롯해 김수현, 임성한, 문영남 작가가 톱 오브 톱으로 분류됐다.

이 관계자는 “서열, 순위 이런 것에서 벗어나야 각각의 행복한 삶에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요? 과정도 소중하고 행복한 거고”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수긍할 만한 내용일지 시간이 날 때 읽어보려고 공유를 해 둔 것에 불과했다. 이 같은 지적은 게시물 공유가 과연 잘못한 행위였는지, 서열화를 과연 벗어날 수 있는 것인지 여러 생각을 들게 했다.

엔터테인먼트는 대중을 즐겁게 만들기 위한 산업이다. 반면 서열화는 당사자들이 받는 스트레스를 커지게 만드는 요소다. 학창시절 좀처럼 오르지 않는 등수 때문에 고민했던 경험은 많은 독자들도 갖고 있을 게다. 즐겁지 않은 상태에서 남을 즐겁게 해줘야하는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건 분명 고역이다.

하지만 엔터테인먼트 각 분야에서 서열화는 이미 깊숙이 파고들었다. 제작되는 콘텐츠는 모두 창작물이지만 상품화되는 순간 서열화는 피할 수 없다. 흥행 순위를 나타내는 영화 박스오피스, 드라마 시청률, 음원 차트 등은 서열화의 기준이 된다. 기자의 게시물에 댓글을 단 관계자도 자신의 회사에서 제작한 드라마가 방송되는 기간에는 매일 아침 시청률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찾아볼 게 뻔하다.



대중은 차트 순위의 변화 등 경쟁 양상을 콘텐츠의 질적 우수성과 관계 없이 즐기는 모습도 보인다. 가끔 인터넷에는 걸그룹의 인기를 땅의 넓이로 비유한 ‘걸그룹 세력 지도’가 올라오기도 한다. 해당 게시물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는 것은 그 만큼 많은 네티즌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는 방증이다. 일부 네티즌들은 이 같은 게시물이 맞네, 틀리네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대다수 방송사 음악프로그램에서 매주 1위를 선정해 발표하는 것도 이 같은 시청자들의 성향을 공략하기 위한 것이다.

드라마 작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창작을 하는 직업이라고 해도 서열화는 진행이 된 지 오래다. 드라마 제작사들이 작가를 섭외할 때 이름값에 따라 회당 원고료가 달라진다. 집필이 끝난 드라마 대본 내용을 검토한 뒤 원고료를 책정하는 게 아니다.

기자라는 일을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서열화에 익숙해진다. 독자들에게 일목요연하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 중 하나가 서열화다. 연예계에서는 콘텐츠의 수치화된 성적표, 매출액으로 서열을 정할뿐 아니라 배우, 가수 등 연예인들도 등급별로 나눈다. 연예인의 이름 앞에 ‘톱스타’ ‘스타’라고 구분지어 수식어를 붙이는 것도 서열화다. 스타성의 정도에 따라 다른 연예인들의 출연료 역시 서열화의 산물이다.

서열, 순위에서 벗어나야 행복해진다고 단언하는 것은 위험하다. 서열의 맨 아래쪽에 위치해 있으면서 선택을 받기도 어렵고 선택을 받아도 생계 유지에 턱없이 부족한 돈을 받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소중한 과정을 많이 경험했지만 여전히 서열의 맨 아래쪽에 위치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감을 느끼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서열의 맨 아래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서열화는 더 나은 삶을 영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자극해 발전을 유도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엔터테인먼트는 무명에서 ‘벼락’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스타가 되는 것도 가능한 분야다. 무명으로 수년을 살아온 드라마 작가가 어느 한 작품이 ‘대박’이 나서, 연예인이 출연작 하나를 잘 선택해서 초고속 서열 상승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에 희망까지 더할 수 있다. 굳이 문제 해결에 도움도 안될 스트레스만 받고 있을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