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 퀸' 김연아도 울고 갈 '당구 요정' 차유람

by조선일보 기자
2009.12.16 08:38:06

[조선일보 제공] “휴∼ 고르기가 너무 어려워요.”

긴 고민 끝에 한숨이 터져 나온다. 12일 오후 4시 서울 영등포의 한 커피숍, 양 갈래로 내린 앞머리 사이로 ‘얼짱 당구소녀’ 차유람(22)이 큰 눈을 깜박이며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다. 한시간 후면 많은 관중들이 자리한 인근 종합 쇼핑몰 특설 경기장에서 게임을 치러야 하지만 긴장감은 온데간데없다.

기자는 이날 남자 스타 16명의 사진을 준비해 갔다. 즉석에서 테이블 위에 사진을 두 장씩 늘어놓고 토너먼트 방식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남자 스타를 고르는 ‘이상형 월드컵’을 진행하기 위해서다. 차유람은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주인공 이민호와 김범 사진을 두고 “도저히 못 고르겠다”며 고개를 내젓기도 했다. 결국 15회의 토너먼트 끝에 그녀가 최후의 이상형으로 고른 이는 탤런트 윤시윤(23). “요즘 시트콤을 자주 보는데 이분은 얼굴이 곱상하신게 너무 멋져요.” 게임에 임할 때는 누구보다 진지한 프로지만 조인성, 유재석, 박태환 등 쟁쟁한 남자 스타들의 사진을 보며 탄성을 지르는 모습은 영락없는 옆집 동생이었다.

빙상스포츠에 김연아가 있다면 큐스포츠에는 차유람이 있다. 최근에는 국제대회에서 잇따라 수상하며 전성기를 맞고 있기도 하다. 물론 운이 좋아 절로 찾아온 결과물은 아니다. 2006년 말 이후 잠시 슬럼프가 찾아오기도 했고 한때는 외모만 보는 팬들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특유의 자신감과 긍정적인 마인드로 이를 극복해냈다. 차유람은 “바쁜 스케줄 때문에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이제 외로움에도 내성이 생겼을 정도”라고 한다.



차유람은 두 딸을 운동선수로 성공시키겠다는 아버지 차성익(55)씨의 뜻을 따라 초등학교 3학년 때 테니스를 시작했다. 현재 함께 당구 선수로 활동 중인 언니 차보람(24)이 테니스를 시작하면서 동생도 자연스럽게 따랐다. “막상 시작해보니 너무 힘들었어요. 성적도 좋지 않았고 체력도 부족해 결국 3년만에 아빠께 못하겠다고 말씀드렸죠.”

아버지는 결국 체력 소모가 적은 운동을 찾아나섰다. 체력은 부족한 대신 승부욕과 집중력, 대담함을 갖춘 차유람에게 당구는 최적의 종목이었다. 실력이 날로 좋아지자 당구에 대한 흥미도 날로 높아져 갔다. “당구에 한창 빠져있을 때는 하루에 열시간 이상 큐를 잡고 있었어요.”

척추가 휠 정도로 당구에 열심이던 차유람은 2003년 한국여자포켓 나인볼 랭킹전 1위를 시작으로 점점 인지도를 쌓기 시작했다. 그녀가 스타로 발돋움한 것은 2006년 9월 잠실 롯데월드에서 벌어진 ‘트릭샷 매직 챌린지’ 결승에서 대선배 자넷 리(38)와 대결하면서부터다. 아쉽게 1-2로 패해 준우승에 그쳤지만 능숙한 트릭샷 묘기를 선보이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어린 나이에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안겨준 당구는 어떤 의미일까? 차유람은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니 내일 당장 당구를 그만둘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한다. “좋아하는 일이고 저와 잘 맞는 일이지만, 미래에 대한 장담을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당구가 저한테는 꼭 ‘남자친구’ 같아요.”




해외 훈련이나 국제대회 출전이 잦은 차유람은 친구가 많지 않다. 가족은 이런 그녀를 각별히 챙긴다. “한국에 있을 때도 가끔 집에서 혼자 컴퓨터를 하고 있으면 아빠, 엄마가 뒤에 서서 기다리고 계세요. 컴퓨터 다 하고 나면 제가 다녀온 나라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시려고요. 가족들과 수다를 떨다보면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두 살 터울의 친언니 차보람은 같은 운동을 하는 동료이자, 지금껏 단 한 번도 남자친구를 사귀어 본 적 없는 그녀에게 가장 든든한 힘이 되는 존재. 차유람은 “한국에 있을 때는 항상 언니와 붙어 다닌다”며 “어릴 때부터 막내기질이 많던 제가 관심과 귀여움을 독차지해서 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다”고 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차유람’을 치면 연관검색어로 ‘독거미’ 자넷 리가 함께 뜬다. 차유람은 “당구 선배인 자넷 리와 비교하는 건 너무 지나치다”고 했다. “저와는 나이 차도 많이 나고, 대결을 해도 자넷 리는 여유 있게 즐기는 입장이지만 저는 아니잖아요. 너무들 비교하시니 가끔은 속상할 때도 있어요.”



차유람은 지난달 21일 중국 선양에서 열린 세계여자포켓볼 선수권 대회에서 현지 언론과 팬들로부터 ‘한국의 장백지’라는 찬사를 받았다. 차유람은 “예뻐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왠지 모르게 당구요정, 얼짱포켓볼소녀 같은 호칭에는 정이 안간다”며 “미용실에서 얼굴이 작고 갸름한 연예인들을 볼 때마다 그런 호칭이 민망해지는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올 여름 섹시 화보까지 찍었지만 몸매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화보는 다 컴퓨터 기술 덕분이라는 것 잘 아시죠? 가슴 볼륨도 좀 더 있으면 좋겠고, 아이를 좋아해서 자식 넷을 낳을 생각인데 골반이 작은 것도 내심 걸려요. 이렇듯 저는 진정한 ‘얼짱’이나 ‘몸짱’은 아니에요.”

지난달 차유람은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외모로만 사랑 받는 것도 괜찮다”고 말한 바 있다. 이를 두고 그녀는 “외국 팬들이 생겼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 나온 말”이라며 “이제는 실력이나 성격과 관련된 애칭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2006 도하 아시안게임 부진 이후 “얼굴로 떴다”는 비아냥을 들어온 차유람에게 2009년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 해다. 지난 8월에 열린 US오픈 9볼 챔피언십에서는 32강에서 탈락해 낙담하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일어섰다. 9월 갤버스턴 월드 클래식 우승에 이어 지난달 초 베트남 아시아인도어게임 포켓 9볼 금메달을 따냈고, 지난 7일 열린 동아시아대회 6레드 스누커에서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덕분에 자신감과 함께 여유도 되찾았다. 이제 당장 연말에 있을 국가대표 선발전과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이 그녀의 목표다. 4년 전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어느 때보다 강하다.

“올해는 제게 3년 같은 1년이었어요. 이제부터가 제 전성기라고 생각해요. 팬들의 우려와 달리 앞으로도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을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내년이 당구 선수 차유람의 해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할테니 지켜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