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소녀가수 안혜지의 롤러코스터 인생

by최은영 기자
2009.06.23 08:49:00

댄스 트로트 싱글 '오늘밤' 들고 컴백...'소심한 하트가 반짝여요~'

▲ 안혜지(사진=한대욱 기자)

[이데일리 SPN 최은영기자] '눈이 큰 사람은 눈물도 많다던데...'.

동그랗게 크면서도 독기 없이 선한 눈빛이 묘해 툭하고 던진 말이 그녀의 오래지 않은 상처를 건드렸나 보다. 질문도 아니고 혼잣말처럼 툭하고 내뱉어진 한마디에 그녀는 진한 눈물부터 떨꿨다.

인터뷰 시작 무렵 "이제는 밝은 얘기만 하고 싶어요"라던 왕년의 인기가수 안혜지(38)의 다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다. 사연 없는 인생이 없단 소리다. 하지만 올해 서른여덟, 안혜지는 남보다 두 세 곱절 더 굴곡진 삶을 살았다.

1988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 서울의 풍경은 그녀에게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단 한 번의 오디션으로 가수가 됐고, 데뷔곡을 발표함과 동시에 가요계 정상에 섰다. 안혜지는 '벌써 이밤이 다 지나고'로 한 해 먼저 데뷔한 이지연과 함께 '여고생 가수'로 가요계를 주름잡던 시절에 대해 "신데렐라가 따로 없었다"는 말로 회고했다.

하지만 동화같은 현실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소속사 문제로 활동이 뜸해졌고 안혜지는 차츰 대중의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그래도 당시는 희망이 있었을 때다.

불행은 서른, 결혼과 함께 찾아왔다. 안혜지는 지난 2000년 음반 제작자이자 매니저였던 김모씨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2년 후 별거에 들어가 2005년 6월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남남이 됐다. 파경의 원인은 남편의 도박. 안혜지는 한순간에 빚더미에 올라앉았고 경남 양산의 친정 소유 땅과 집까지 모두 경매로 넘어가는 극한의 고통에 시달려야했다. 그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건 평생에 씻지 못할 한으로 남았다.

"어느날 갑자기, 너무도 허무하게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생각만 하면 가슴이 저려요. 경매로 집이 넘어가던 상황을 지켜보며 충격에 쓰러지셨는데 그게 마지막이셨죠. 돈이 없어 큰 병원 한 번을 못갔어요.(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더니) 한 평 남짓한 산소도 못해드렸네요. 우리 아버지, 어찌보면 저 때문에 돌아가신 건데... 그 죄스러움을 어찌 다 씻을까요."  
▲ 안혜지(사진=한대욱기자)

그녀와 인터뷰를 하던 날 오전에는 국민 MC 송해가 아침프로그램에 출연해 사고로 아들을 잃고 자살을 기도했던 사연을 털어놔 무수히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안혜지는 "가족을 잃어본 사람만이 그 아픔을 알 수 있다"며 송해의 일을 내 일처럼 아파했다. 송해는 당시 방송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겐 무엇보다 사람이 곁에 있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도 했다. 안혜지는 그 말에 특히 더 깊이 공감하는 듯 했다.



한때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방황했던 그녀 자신이 병상에 누워서도 딸 생각에 TV 앞을 떠날 줄 모르는 어머니를 보며 다시 설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암으로 수술을 두 차례나 받고 방사능 치료 때문에 뼈가 녹아 온종일 누워만 계시는 어머니지만 안혜지는 그런 어머니가 있어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녀는 최근 불운의 그림자를 훌훌 털고 신곡을 발표, 다시금 활동에 나섰다. 그녀가 선보인 댄스 트로트 싱글의 타이틀 곡은 '오늘밤'. '소심한 하트가 반짝여요'라는 후렴구가 특히 인상적인 노래다.

"우리 어머니는 제가 TV에 다시 출연하게 된 게 좋으신가봐요. 아직 방송활동 전인데 'TV에는 언제쯤 나오냐' 하루도 빠짐없이 챙겨 물으시죠. 어떤 날은 하루종일 TV 앞에서 제 과거 활동 영상을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반복해 보기도 하시구요. 어머니는 '내가 죽고 싶어도 너 때문에 못 죽는다'고 하시는데, 저는 그 반대예요. 그런 어머니가 있어 살아갈 힘을 얻죠. 우리 어머니 어릴 적 꿈이 가수였다고 해요. 제가 가수로 성공했을 때 '꿈을 이뤘다'며 너무도 좋아하셨던 우리 어머니... 어머니에게 다시 웃음을 찾아드리고 싶어요. 마지막 효도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노래하려구요."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아찔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경사 심한 롤러코스터를 타고 십여년을 줄곧 내리막 길만 달린 기분이랄까.

화려했던 10대, 평범했던 20대, 그리고 생지옥이 따로 없었던 30대까지. 새 앨범을 들고 가요계를 다시 찾은 그녀는 다가올 40대는 웃으면서 맞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새 노래도 신나는 댄스 트로트로 정했다.

안혜지는 무대 위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자신을 보며 누군가 삶의 무게를 덜고 힘을 낼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보람된 일이 없을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이제부턴 '오늘밤' 노래하며 실컷 웃으려구요. 웃으면 복이 온다잖아요. 그러다보면 제 데뷔곡 가사처럼 '벌써 이밤이 다 지나고' 얘기하며 웃을 날 오지 않을까요?"

새 노래에 대한 관심을 당부하며 손으로 소심한 하트를 그려 보이는 그녀에게선 희망의 기운이 절로 느껴졌다.

(사진=한대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