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꽃도 삶도 피어있을 때 아름답다

by조선일보 기자
2009.02.19 08:34:19


[조선일보 제공] 상실에 대한 경구(警句)는 상실을 겪어야 비로소 절절하다. 그럴 땐 이별을 읊은 유행가 가사조차 손톱에 박힌 유리조각처럼 아프다. 누군가의 죽음처럼 압도적인 상실은 '아픔'이란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죽음이란 충격은 남겨진 자들 삶의 모든 영역에 오랫동안 낙진(落塵)을 덮는다. 독일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19일 개봉)'은 삶과 죽음, 그리고 흔히들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 무엇에 대한 통찰이다. 20여년 영화를 만들어 온 여성 감독 도리스 되리(D��rrie·54)는 거장(巨匠) 자리에 한 걸음 바싹 다가섰다.

트루디(한넬로어 엘스너)는 의사로부터 남편 루디(엘마 베퍼)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는다. 그녀는 이를 알리지 않고 평생 소원이었던 일본 후지산 여행을 남편에게 제안한다. 남편은 느닷없는 일본 여행 대신 큰아들과 딸이 사는 베를린 여행을 권한다. 남편의 삶이 종착점에 가까워졌음을 아는 아내는 그의 뜻을 따른다. 이 여행의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먼저 삶을 마감한다. 남편은 그제야 막내아들이 있는 일본으로 떠난다.

남편의 삶은 오전 7시28분발 출근열차와 정오에 먹는 샌드위치 도시락으로 규정된다. 남편은 이렇게 안정된(고착된) 삶이 아내 덕분이란 걸, 아내가 죽기 전까지 깨닫지 못한다. 아내는 손수건을 다림질하다가 떨어뜨린 눈물도 다리미로 지워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은 남편의 삶 곳곳에 조여 있던 볼트와 너트를 낱낱이 해체한다. 남편은 "내게 남은 아내의 기억은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하고 혼잣말한다. 그러나 남편의 여생(餘生)은 황폐해지지 않는다. 아내가 죽은 뒤 그는 만사를 호(好)와 오(惡)로 나눠온 자신의 경계가 덧없이 허물어지는 기묘한 경험을 한다.

못마땅했던 레즈비언 딸의 여자 친구는 뜻밖에도 큰힘이 된다. 아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부토(舞蹈·일본 현대무용)를 생전 눈길 한번 안 줬으나, 도쿄 공원에서 혼자 부토를 추는 여자 아이를 만나면서 아내의 소망을 이해한다. 만개한 벚꽃 그늘 아래서 부토를 추던 여자 아이는 "벚꽃은 가장 아름다운 덧없음"이라고 말한다. 남편의 마음속 풍랑이 마침내 고요해진다. 열흘이면 스러질 벚꽃엔 환호했지만 언제 끝맺을지 모르는 인생에선 한번도 열광하지 못했음을 그는 뉘우친다.

이 영화는 미국 영화 '어바웃 슈미트(2003)'와 여러모로 닮았다. 지독한 상실감에 이은 가족의 해체 그리고 제3자에 의한 치유 과정이 그렇다.



주인공은 아내의 스웨터와 치마를 입고 목걸이를 건 채 벚꽃 나들이를 하면서 삶의 등짐을 벗는다. 후지산이 보이는 호숫가에서 아내 대신 부토를 추는 장면은 사뭇 몽환적이지만 빼어나게 아름답다. 영화와 문학이 경주(競走)를 벌인다면 이런 장치 덕에 영화가 조금 더 유리할 것이다.



·죽은 아내를 찾는 독일 노인의 일본(후지산) 여행. 아름답기도 하지만 너무 신비적이기도 하다. ★★★☆

이상용·영화평론가

·벚꽃처럼 덧없는 인생, 그림자처럼 춤추는 사랑에 문득 목이 멘다. ★★★★

황희연·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