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기자석] Jose, 그가 내게 건네 준 마지막 싸인볼(上)
by고남욱 기자
2007.06.05 11:13:35
[이데일리 SPN 고남욱 명예기자]
1999년 10월 17일 -“It ain't over till it's over'”1999년 10월 17일의 사직야구장. 롯데 자이언츠는 '가을에도 야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직야구장을 가득 메운 3만 부산 갈매기들의 표정에는 패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9회 초까지 3-5로 뒤진 상황. 9회 말 원정팀 삼성의 마운드 위에는 잘생긴 얼굴에 미끈한 체격을 지닌 광주출신 남자가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임창용(31). 그는 홈플레이트 위에서 먹이를 사냥하는 코브라처럼 타자들의 방망이를 향해 달려드는 '뱀 직구'로 언제나 뒷문이 불안했던 삼성에서 수호신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임창용은 동향출신의 선동렬(44, 현 삼성라이온즈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롯데에게 늘 패배라는 끔찍한 선물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안겨다 주었다. 관중들의 일부는 패배를 확신한 듯 서서히 야구장을 빠져나가고 있었고 TV 중계가 있었다면,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중단합니다."라는 얼토 당토 않은 변명이 설득력을 가질 만큼 사직 구장 분위기는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9회말 1사 1-2루의 상황. 홈런이 나와야만 경기를 이길 수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검은 피부에 근육으로 다져진 야생마를 연상케 하는 남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호세, 한 방 치라!" 사직을 가득 메운 3만의 갈매기들이 애절하게 외치며 그에게 기를 불어넣었다.
"딱!" 그 남자는 임창용의 바깥쪽 꽉 찬 코스의 직구를 받아쳐 사직구장의 좌측 스탠드 위에 꽂아 넣었다.
호세가 프로야구 당대 최강의 마무리를 침몰시키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삼성과 롯데선수들의 머릿속엔 모두 이 글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AGAIN 1984'. 또한 이 홈런은 호세가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홈런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한다.
Gigantes Attack, 거신병의 공습1984년 한국시리즈가 시작되기 전 롯데 자이언츠는 삼성 라이온즈에게 비해 객관적인 전력에서 그들의 팀명인 거인이 아닌 ‘난쟁이’라는 수모에 가까운 평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170cm의 ‘자이언츠’ 최동원(49, 현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은 한국프로야구라는 정글에서 제왕으로 군림하던 사자들을 수면제 없이 잠재워버렸다.
그는 ‘야구는 투수놀음’이란 야구격언이 ‘비유법’이기도하지만 때론 ‘직유법’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그렇게 그는 당시 구도(球都) 부산에 한국시리즈 우승트로피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1999년 삼성 라이온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플레이오프가 시작되기 전. 야구전문가들은 15년 전 한국시리즈를 회상하며 머릿속으로 복잡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바뀐 것은 금테안경의 최동원 대신, 검은 갈매기 호세가 버티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1999년 당시 삼성의 주력선수들을 살펴보면 말 그대로 탄성 그 자체였다. 약관 23세 나이에 54개의 타구를 담장 밖으로 넘기며 한국프로야구에서 50홈런이란 신기원을 일궈낸 홈런타자 이승엽(31)을 필두로 그들의 뒤를 받치는 ‘소리 없는 강자’ 김한수(36)와 정경배(33, 현 SK 와이번스).
후반기에서만큼은 최고의 외국인 선수 중에 한명이라고 평가받던 찰스 스미스(38), 양준혁과 쌍벽을 이루는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교타자 중 한명인 김기태(38·현 SK 와이번스 코치).
롯데에서 트레이드 된 후 플레이오프에서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 붓는 듯 활약을 보여주던 김종훈(35). 수비 부담이 큰 유격수임에도 ‘주머니 속의 송곳’같은 활약을 선보이던 김태균(36. 현 SK 와이번스)까지. 이 타선은 굳이 기록지를 일일이 들춰보지 않더라도, 타 팀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삼성은 타선의 힘이 약해서 프로야구 출범한지 18년이 되도록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한 팀이 절대 아니었다. 문제는 투수력이었다. 삼성의 자랑거리였던 특급투수들은 페넌트레이스 내내 믿음을 안겨다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포스트 시즌 마운드 위에 오르면 거짓말처럼 패전행진을 기록했다. 특히 경기를 마무리하러 나왔다가 역전패를 당한 기억들은 더욱 더 쓰라렸다. 어떤 이들은 삼성이 페넌트레이스에서 주축투수들을 지나치게 혹사해서라는 지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프로원년이었던 1982년 OB 베어스의 에이스 박철순(54,전 두산 베어스)을 시작으로 삼성을 상대했던 상대팀들의 에이스들 역시 혹사당한 어깨를 안고 마운드위에 오르긴 마찬가지였다.
이 당시 단장을 거쳐 삼성 라이온즈의 사장자리에 올랐던 전수신(67·삼성 라이온즈 전 사장)씨는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선 리그 최강의 마무리투수 영입이 필수조건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1998년 겨울, 칼을 뽑아 들었다. 삼성의 프랜차이즈인 스타이자 ‘푸른 피가 흐르는 사나이’ 양준혁(38)을 당대 최강의 마무리 투수 해태 타이거즈 임창용과 트레이드 시킨 것이다.
곽채진(34, 당시 삼성 라이온즈)과 황두성(31, 현대 유니콘즈)이라는 최고구속 150km까지 던지는 두 명의 투수 유망주와 협상테이블 밑으로 오간 수십억 원의 ‘언더 머니’는 전수신 사장을 비롯한 삼성 구단의 우승을 향한 열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게끔 하는 대목이었다.
단지 삼성의 ‘우승 콤플렉스’만은 아니었다. 임창용은 그 당시 최고구속 153km까지 나오며 홈플레이트 근처에서의 움직임이 대단히 좋은 '뱀 직구'와 타자들의 눈앞에서 날카로운 각을 이루며 떨어지는 140km의 초고속 슬라이더를 던지는 23살의 앞날이 창창한 청년이었다.
더욱 매력적인 점은 그가 본격적인 풀타임 마무리를 시작한지 2시즌밖에 안 되는 싱싱한 어깨를 지닌 투수였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1998년 12월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야구 ‘드림팀 1’의 일원으로 금메달리스트가 되어 병역이란 족쇄에서 풀린 그는 말 그대로 ‘날개달린 호랑이’ 그 차체였다.
삼성 팬들은 선동렬에게 막히며 패배의 아픔을 겪던 기억을 임창용을 통해 상대팀들에게 고스란히 안겨다주는 쾌감을 경험했다. ‘푸른 피가 흐르는 사나이’ 양준혁을 떠나보낸 마음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지만 양준혁이 떠났음에도 여전한 위력을 자랑하는 ‘살인타선’과 임창용의 엄청난 페이스의 구원행진은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부풀어 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호세의 한방이 그들의 기대를 무너트려버린 것이다.
“삼성 라이온즈 임창용의 공이 가장 치기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그것을 내 마음 먹은 대로 보냈을 뿐이다.” (펠릭스 호세, 1999년 10월 17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플레이 오프 5차전이 끝난 후 가진 인터뷰에서.)
경기 직후 전문가들의 인터뷰에서도 임창용의 공은 절대 실투가 아니었다라고 언급할 만큼 바깥쪽에 꽉 찬 볼이었지만, 호세는 여지없이 그 공을 넘겨버렸다. 이 타구 한방으로 삼성쪽으로 기울던 시리즈의 무게 추를 롯데 쪽으로 돌려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말 ‘기적’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나오는 줄 알았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호세는 최종전까지 혈투를 펼쳤던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는 삼성 선발 노장진(33, 전 롯데자이언츠)의 '돌직구'를 백스크린으로 넘겨버렸다. 호세는 대구구장에 지는 석양을 감상하며 유유히 베이스를 돌았다.
이 경기에서 일부 성난 대구 팬들이 던진 물병을 맞고 흥분하여 관중석으로 방망이를 날리는 사상 초유의 사건을 일으켰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또 다시 포스트시즌에서 삼성의 패배를 봐야만 하는 것에 대한 분풀이였는지도 모른다. 이때부터 이 선수는 롯데 팬들에게 '호세 장군' 혹은 '호세 형님'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결국 호세가 불러일으킨 후폭풍은 엄청났다. 서정환 삼성 라이온즈 감독은 경질(52,현 기아 타이거즈)됐고 임창용은 큰 충격에 시달렸다. 호세가 출국당시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했던 삼성 라이온즈와의 1999년 플레이오프는 그렇게 끝이 났다.
당시 팀 내 구심점은 마해영 박정태였지만, 호세는 일반 외국인 선수들에게 보여 지는 분위기와는 무언가 다른 팀 리더로서의 면이 항상 내재되어 있었다. 롯데가 마침표를 찍는 순간에는 언제나 호세가 있었다. 생물학적으로 존재할까라고 의구심을 품던 검은 갈매기 한마리가 1999년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호세의 리더로서의 면모에 대해 1999시즌 당시 롯데의 주축투수였던 박석진(35)은 이렇게 회상한다.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때 나는 내 기대치에 못 미치는 피칭을 해서 많은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호세가 나에게 와서 말을 건냈다. "너는 우리 팀의 에이스다. 지금 점수를 줬다고 기죽을 필요는 없다. 내가 나가서 너를 웃게 해주겠다. 에이스는 어느 순간에도 자존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다독거려줬다.“ 결국 박석진이 눈물을 흘리며 플레이오프 MVP에 선정되는 순간 그의 옆에는 호세가 있었다. 어메이징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던 1999년 가을. 그 모습을 기억하는 팬들에게 호세는 특별함 그 이상이었다.
Felix Jose, 1999년 가을 티켓은 그가 들고 있었다.1999년 시범경기였다. 근육질의 한 선수가 커피포트에서 끓어오르는 증기처럼 씩씩대면서 덕아웃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그 증기는 웃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왜 도루를 시도했냐는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고, 그는 그렇게 답했다.
“시범 경기는 말 그대로 내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무대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시도해봐야 하는 것은 내게 당연하다. 루상에서 내가 움직인다는 것을 상대 투수들이 인지했으면 좋다. 확률을 늘린다는 것, 그것은 내게 야구의 유쾌함을 주기에 충분하다.(웃음)”시범경기에서 펠릭스 호세는 자신의 좋지 않은 무릎을 어루만지며, 도루를 감행했다. 타고난 재능을 갖춘 선수이면서 동시에 항상 노력하는 선수이기에 상대팀 코칭스태프들은 하나같이 호세가 타석에 들어서면 분주해졌다.
몸쪽으로 절대 붙이지 말고 코너워크 위주로 바깥쪽에 걸치게 하는 공을 던지라고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런 전략이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호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지의 강인함을 더욱 표출하기 위해 배트를 길게 잡았다.
특히 잠실구장에서 벌어진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손혁(34)의 완전히 제구가 된 바깥쪽 공을 당겨 우중간 스탠드 상단에 우겨넣는 모습은 호세의 1999년 몰고 올 폭풍이 더 거세질 것을 예고한 타구였다. 단순히 힘을 바탕으로 타구를 날리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컨택을 바탕으로 하기에, 투수들이 호세를 상대하기에 꺼려할 수밖에 없던 시즌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호세가 가세함으로 인해서 1992년 강병철 감독(61,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 지휘봉을 잡으며 우승하던, 소총으로 이루어진 타선은 어느 정도 자취를 감췄다. 롯데 자이언츠 팬들이 그렇게 갈망하던 정교한 대포가 1999년 타석으로 오게 된 것이다. 마해영(37, LG 트윈스)이 입단했을 때도 기대했었고, 임수혁(38, 전 롯데 자이언츠)이 타선에 가세했을 때에도 기대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실현시켜 준 선수는 호세였다.
1999년 호세의 모습을 보면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라는 인기시트콤의 제목에서 따온 <웬만해선 호세를 막을 수 없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한해였다.
1999년 돌풍이라는 평을 받으며 승률 2위로 두각을 나타내던 롯데는 호세가 가세하기 전인 1997년과 1998년에는 2년 연속으로 순위표의 맨 아랫줄에 랭크 돼 있었다. 타고투저가 심하다던 1999년이었지만 타율 0.327(9위)·36홈런(5위)·122타점(2위). 장타율 0.636(4위).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 킬러 본능과 팀 공헌도는 당시 언론에 보도된 대로 수치로 판단되지 않는 그 이상이었다.
호세는 소총군단 이미지가 강했던 롯데의 오랜 갈증을 단번에 씻어주었다. 1999년 호세의 기록은 롯데 타자 역사상 최고의 기록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1999년은 그가 한국의 야구팬들에게 조금 다른 느낌의 방법으로 인사하던 바로 그 해였다. 호세의 매력에 빠진 롯데 팬들은 그와 함께 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라운드에서 솔루션만 제시해줄 뿐이었다.
<사진-장원석,이준열,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