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훈 PD '한류·광복 70년' 희망을 말하다

by양승준 기자
2015.01.09 08:44:11

[빅샷에게 듣는다] 신년 릴레이 인터뷰

‘독서광’인 이병훈 PD의 서울 여의도 사무실 책장에는 책이 빼곡했다. 최근에는 장하준 교수의 신작 ‘경제학강의’를 가장 재미있게 봤다고 했다. 고희를 넘긴 창작자는 유행에도 민감하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내가 천문학을 유독 좋아해서 그런가? 하하하.”(사진=김정욱 기자, luke98@).
[이데일리 스타in 양승준 기자] 처음에는 ‘문제아’였다. 방송사에 들어간 첫해 ‘배달 사고’를 크게 쳤다. 부산MBC에 보내야 할 필름을 잘못 보내 편성국에서 쫓겨났다. 1970년, 스물여섯이 되던 해 일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제작국으로 건너간 뒤에는 성우였던 아내와 연애를 하다 작품을 ‘말아 먹었다’. 하루에 두 번씩 만나며 드라마 촬영을 소홀히 한 탓이다. 이때 예능국으로 또 한 번 쫓겨난 ‘사고뭉치’는 한국 사극의 역사가 됐다.

주인공은 이병훈 PD(71). 평균 시청률 53%를 기록한 ‘허준’(1999)이 대표작 중 하나다. ‘대장금’(2003)으로 한류의 새 길을 연 제작자로 유명하다. 스리랑카부터 올해 쿠바까지. 전 세계 100여 개국의 사람들이 ‘대장금’을 봤다. 왕보다 서민에 주목하고, 기록에 없는 이야기는 상상력으로 채운 게 ‘이병훈 사극’의 특징. 사극에 친근함과 새로움을 줘 일군 성과다. 한국 최고령 드라마PD의 명성은 진행형이다. 최근 ‘대장금2’ 제작 얘기가 나오자 이 PD가 화제의 중심에 선 이유다.

드라마 한류에 대한 위기의식이 컸다. 한류의 주역이던 사극에 비상이 걸려서다. 2007년 ‘주몽’ 이후 세계시장에서 빛을 본 사극이 없었기 때문. 변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 PD는 “새로운 감각과 재미가 필요하다”고 봤다. ‘도전’에 대한 강조다.

“변해야 해요. ‘허준’을 기획할 때 딸이 ‘사극 하지 마라’고 하더군요. 친구들이 다 싫어한다고. 사극을 전문으로 해 온 아빠에 사극을 찍지 말라고 하니 충격이었죠. 기존의 틀을 깨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때부터 의상을 바꾸고 대사를 현대어로 풀었죠. 예고편에는 랩 음악을 깔고요. 다들 미쳤다고 난리였는데 결국 중·고등학생이 사극을 보기 시작했죠. 변화를 위해서 새 술은 새 부담에 담아야 해요. 지금 이 시대 시청자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사극을 한 번도 안 해본 작가를 찾아 도전해 보는 것도 방법이지요.

사극이란 장르 자체의 생명이 다한 건 아닐까. 되레 이 PD는 “사극은 현대물보다 한류 콘텐츠로 더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다.

“‘별에서 온 그대’를 볼까요? 중국과 일본 등에서 굉장히 히트했지만, 지역별로 편차가 있죠. 결국, 보편성의 문제죠. 국경을 초월해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려면 이야기가 익숙해야 해요. 사극 속 역경을 헤치고 일어서는 등장인물의 성장과 갈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감이 쉽죠. 여기에 음식과 건강 등 인류 보편적인 소재를 녹이면 더 폭발력이 커지고요. 같은 자본을 투입한다고 봤을 때 현대물의 성공이 더 어렵죠. 특히 판타지물 같은 건 기술과 자본에서 미국 등을 당해내기 쉽지 않고요.“

이병훈 PD는 이영애를 가장 기억에 남는 배우로 꼽았다.‘대장금’이 화제작이라서만은 아니다. 이 PD는 “이영애는 드라마 출연할 때도 톱스타였는데 항항 촬영 시작 30분 전에 와 준비했다”며 성실성을 높이샀다. 이영애는 자신의 촬영이 없을 때도 밖에 나와 동료들의 연기를 지켜보며 함께 어울릴 정도로 소탈했다(사진=이병훈 PD)
한류 열풍의 주역이 본 한류의 미래는 어떨까. 이 PD는 ”교류가 중요하다“고 봤다.

”한류도 문화예요. 변화에 맞춰 가야 하죠. 한쪽으로만 가면 부작용이 생겨요. 혐한류처럼요. 이런 점에서 그룹 엑소 멤버를 중국인으로 구성하는 건 현명한 일이라 생각해요. 같이 간다는 느낌을 주니까. 한류가 아시아의 문화라는 인식을 줘야 해요. 그래야 오래갈 수 있어요.“



‘동이’에 출연했던 한지민은 이 PD를 “모든 걸 믿고 따라갈 수 있는 선장님”이라고 했다. 이 PD는 ‘덕장’으로 불린다. 이영애를 비롯해 전광렬, 이서진, 조승우, 이요원, 이보영 등 여러 스타와 수 백 명의 스태프를 이끌고 40년 넘게 큰 탈 없이 현장을 지휘했다. 촬영 뒤 배우들에게 문자 메시지로 혼을 낼 때도 ‘♥’나 ‘★’를 넣어 부드럽게 충고한다. 인터뷰를 위해 기자와 문자를 주고받을 때도 ‘♥’를 빼 먹은 적이 없다. 세월호와 ‘땅콩 회항’사건 등으로 위기관리 리더십이 강조 시기. 이 PD는 ‘소프트 리더십’의 중요성을 얘기했다.

“즐겁게 일해야 결과가 좋아요. 리더가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하죠. ‘허준’을 촬영하면서 현장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기 시작했어요. ‘남을 불쾌하게 할 정도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게 하면 누구라도 벌금을 내야 한다’는 거였죠. 실제로 만 원씩 받았고요. 일하는 데 짜증을 심하게 내던 조연출에게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고 내쫓았어요. 협업에서 중요한 건 분위기예요. 안 힘든 일이 어디 있겠어요. 즐겁게 일하려고 노력하면 힘든 게 덜하죠. 즐기면서 하는 자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으니까요.”

‘즐겁게 살자’가 생활 좌우명이라는 이 PD다. 타고난 낭만주의자라서가 아니다. 이 PD의 삶을 보면 ‘한국사’가 보인다. 역경이 많아서다. 이 PD는 일곱 살 때 6·25를 겪었다. 전쟁이 터진 뒤 이틀 후 아버지를 잃었다. 남겨진 4남매는 어머니가 홀로 키웠다. 가정 형편은 당연히 어려웠다. 가족은 떨어져 살았고 등록금 걱정을 하지 않고 산 적이 없다. 두 살 때 광복(1945)을 맞고, 6·25란 국가적 격변을 몸소 겪은 그다. 불안정한 일자리와 치솟는 집값 등 사회적 압박으로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가 등장한 ‘절벽사회’를 어떻게 볼까.

“우리만의 문제는 아녜요. 그리스는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죠.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성장통이죠. 다만, 청년들에 ‘비는 24시간 오지 않는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버티면 이기죠. 현재를 견뎌야 해요. 세상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나도 그랬고. 이걸 기억해야 해요. 지금 충실하지 않으면 기회도 내가 바라는 내일도 없다는 걸요.”

더 나아가 이 PD는 굴곡의 역사를 견딘 한국인의 근성을 들어 희망을 얘기했다.

“광복은 어려서 기억이 안 나지만 6·25 전쟁의 충격은 생생해요. 길거리에 쌓여 있던 시체들. 부러지고 피 흘리는 걸 어려서 너무 봐 우리 세대는 충격에 둔감해요. 1·4후퇴 때 평택을 지나 피난 가는데 도로에 자갈밭처럼 깔린 탄피가 아직도 기억나요. 그게 재미있어서 주머니에 한 움큼 넣었다고 어머니한테 야단맞았죠. 임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전쟁을 거쳐 황무지 같은 나라가 40년 만에 녹지로 바뀌는 걸 지켜보며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열정과 끈기가 바로 한국인의 강점이잖아요. 이런 특성 때문에 한국문화도 더 빛을 볼 수 있을 거라 봐요. 드라마를 봐요. 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큼 드라마를 많이 제작하는 나라는 없어요. 그만큼 하나를 시작하면 끝을 본다는 거죠. 여기에 희망이 있다고 봐요.”

▲이병훈 PD는...

작은 시골 마을인 충남 전의에서 1944년 태어났다. 6·25 때 아버지를 잃고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놓지 않은 건 책이다. 인천 자유공원 옆에 있는 축현초등학교에 무료로 책을 빌려주던 도서관에서 4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책을 빌려 읽었다. 코난 도일의 추리 소설을 좋아했다. 이때 읽은 책이 드라마의 재료가 됐다. 천문학과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소년은 1964년 서울대 임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과수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ROTC 장교로 군을 제대한 후 친구 따라 우연히본 방송사 시험에 합격했다. 1970년 MBC 공채 PD 2기로 입사했다. ‘113 수사본부’(1974)에 이어 ‘제3교실’(1975)을 제작하며 연출에 자신감을 키웠다. 사극에 깊은 애정은 ‘암행어사’(1981)를 하면서부터 싹텄다. 8년에 걸친 ‘조선왕조 5백 년 시리즈’(1983)를 연출하면서 사극의 길로 방향을 잡았다. 드라마국 데스크로 현장을 떠난 지 8년 만에 ‘허준’(1999)를 연출해 국민 감독이 됐다. 이후 ‘상도’(2001)‘대장금’(2003)‘서동요’(2005) ‘이산’(2007) ‘동이’(2010)‘마의’(2012) 등을 제작했다. 2006년 사극 발전에 이바지한 공을 인정받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