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초라했지만 끝은 창대했다' 아르헨티나, 대반전 스토리
by이석무 기자
2022.12.19 05:24:30
| 아르헨티나 리오넬 메시가 월드컵 시상식을 마친 뒤 아르헨티나 팬들과 함께 축제를 벌이고 있다. 사진=AP PHO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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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가 우승 트로피를 들고 팬들과 함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사진=AP PHO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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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시작은 초라했지만 끝은 창대했다. 아르헨티나가 2022 카타르월드컵에서 대반전드라마를 쓰면서 36년 만에 세계 축구 정상에 우뚝 섰다.
아르헨티나는 19일(한국시간) 카타르 루사일 스타디움에서 열린 프랑스와의 카타르월드컵 결승전에서 연장전에서도 3-3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지만 승부차기에서 4-2로 이기고 극적으로 월드컵 우승을 달성했다.
이로써 아르헨티나는 1986년 멕시코 대회에서 디에고 마라도나를 앞세워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린 뒤 36년 만에 다시 세계 축구 정상에 우뚝 섰다. 1978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이룬 첫 우승까지 포함하면 이번이 역대 3번째 우승이다. 이번 우승으로 아르헨티나는 최다 우승 기록에서 브라질(5번), 이탈리아, 독일(이상 4번)에 이어 단독 4위로 올라섰다.
아르헨티나는 이번 대회 전부터 브라질, 프랑스 등과 더불어 강력한 우승후보로 주목받았다. 1순위까진 아니더라도 각종 우승 예상에서 아르헨티나는 항상 빠지지 않았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가장 최근에 열렸던 남미 대륙 국가대항전인 2021 코파 아메리카에서 아르헨티나는 28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그것도 강력한 라이벌인 브라질을 결승에서 이기고 거둔 성과였다. 월드컵을 앞두고 A매치 36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달릴 정도로 경기력과 분위기도 좋았다.
무엇보다 동기부여가 확실했다. ‘축구의 신’ 리오넬 메시(파리 생제르맹)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이번이 내 마지막 월드컵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선수들은 대표팀의 리더이자 정신적 지주인 메시에게 월드컵 우승을 안겨주자는 목표의식으로 똘똘 뭉쳤다.
이번 대회에서 아르헨티나의 시작은 좋지 못했다. 조별리그 C조 1차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1-2로 덜미를 잡혔다. 대회 초반 최대 이변의 희생양이 됐다. 이탈리아의 역대 A매치 최다 무패 기록에 단 한 경기를 남긴 상황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했다. 아르헨티나가 월드컵 본선에서 아시아 팀에 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경기력도 실망스러웠다. 아르헨티나 특유의 빠른 스피드와 정교한 패스 및 강한 압박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선수들의 몸은 무거워 보였고 메시는 상대 집중마크에 고립됐다.
이는 대회 일정을 모두 마친 이번 월드컵을 통틀어서도 최대 사건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르헨티나를 이긴 뒤 경기 다음 날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할 만큼 국가적인 경사로 받아들였다.
아르헨티나는 큰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전 패배는 오히려 아프지만, 몸에 좋은 훌륭한 예방주사가 됐다. 이후 정신을 바짝 차린 아르헨티나는 빠르게 제 실력을 되찾았다. 조별리그 탈락 위기에 몰린 아르헨티나는 매 경기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멕시코와 2차전에서 메시의 선제 결승골에 힘입어 2-0으로 승리하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이어 메시와 로베르토 레반도프스키(바르셀로나)의 특급 골잡이 대결로 관심을 끈 폴란드와 조별리그 3차전에서도 2-0으로 승리, 조별리그 C조를 1위로 통과했다.
토너먼트에서도 아르헨티나는 승승장구했다. 호주와의 16강전에서 메시와 ‘2000년생 신성’ 훌리안 알바레스(맨체스터 시티)의 연속 골에 힘입어 2-1로 승리하고 8강에 올랐다.
최대 고비는 네덜란드와 맞붙은 8강전이었다. 2-0으로 앞서다 후반 막판 체력이 떨어지면서 네덜란드에 2골을 내줬다. 경기 내내 네덜란드 선수들과 신경전을 벌일 만큼 감정이 과열됐다. 심지어 경기 중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메시마저 상대 선수에게 심한 말을 하며 발끈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승부차기 끝에 네덜란드를 4-3으로 이기고 큰 산을 넘었다. 점차 우승이라는 고지가 보이기 시작한 가운데 4강전에선 지난 대회 준우승팀 크로아티아를 3-0으로 누르고 결승에 안착했다.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 프랑스였다. 상대 팀 에이스인 킬리안 음바페(파리 생제르맹)는 메시의 팀 동료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메시 대 음바페 대결구도가 형성된 가운데 치열한 난타전이 벌어졌다. 아르헨티나가 전반에 먼저 2골을 넣으며 앞서 나갔지만 프랑스는 후반 35분과 36분, 불과 1분 사이 2골을 몰아치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연장전에서 아르헨티나가 연장 후반 3분 메시의 골로 다시 앞서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음바페가 연장 후반 13분 페널티킥 동점골을 터뜨려 다시 경기를 원점으로 돌렸다. 마치 액션 영화나 컴퓨터게임의 끝판왕끼리 최후의 대결에서 한 방씩 주고받는 모양새였다.
‘승리의 여신’의 선택은 아르헨티나였다. 승부차기에서 아르헨티나는 4명의 키커가 모두 골을 넣은 반면 프랑스는 2명이 실축하면서 ‘11m 러시안룰렛’에서 아르헨티나가 승리했다.
이번 대회에서 아르헨티나가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메시의 강력한 조력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전까지 주요 국제대회에서 메시는 집중마크에 자주 고립됐다. 상대팀은 ‘일단 메시만 막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나섰다.
이번엔 달랐다. 메시 옆에는 든든한 도우미들이 버텨줬다. 2000년생 공격수 훌리안 알바레스(맨체스터 시티)는 이번 대회에서 4골을 터뜨리며 ‘제2의 메시’로 자리매김했다. 알바레스가 확실한 공격 옵션으로 상대 팀에 인식되자 집중 견제가 분산됐다. 그 덕분에 메시의 운신 폭은 훨씬 넓어졌다. 이는 곧 더 큰 활약과 공격포인트로 이어졌다.
2001년생 미드필더 엔소 페르난데스(벤피카)는 이번 대회를 통해 아르헨티나 축구의 미래로 자리매김했다. 페르난데스는 이번 대회 최고의 21세 이하 선수에게 주는 ‘영플에이어상’을 받았다.
미드필더 로드리고 데 폴(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은 ‘메시의 보디가드’로 불렸다. 메시가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몸싸움 등 온갖 궂은 일을 책임졌다. 심지어 메시가 상대 팀 선수와 신경전을 벌일 때면 데폴이 찾아와 대신 싸워주기까지 했다. 데폴은 벤치멤버로 이번 대회를 시작했다. 대회 초반 주전 공격수로 나섰던 라우타로 마르티네스(인터 밀란)가 부진을 면치 못하자 곧바로 주전으로 발탁됐고 기회를 얻자마자 큰 활약을 펼쳤다. 조별리그 폴란드, 호주전 득점에 이어 크로아티아와 4강전에선 멀티골까지 기록했다.
이번 월드컵 출전국 중 ‘최연소 사령탑’인 리오넬 스칼로니(44) 감독의 과감한 용병술도 아르헨티나 우승에 큰 힘이 됐다. 특히 대회 초반 기대에 못미쳤던 마르티네스 대신 과감하게 알바레즈를 공격 선봉에 내세운 것은 ‘신의 한 수’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