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 감독 "사랑, 지겨운데 재밌으니···"(인터뷰)

by최은영 기자
2012.10.16 08:39:27

중국이 인정한 한국 멜로의 거장
여섯 번째 사랑 영화 `위험한 관계` 연출
장동건·장쯔이·장바이즈와 작업

[이데일리 스타in 최은영 기자]‘8월의 크리스마스’·‘봄날은 간다’·‘외출’·‘행복’·‘호우시절’···. 한국에서 멜로 영화를 가장 잘 만든다는 허진호 감독(49)이 색깔 다른 멜로 영화를 들고 돌아왔다. 지난 11일 개봉한 ‘위험한 관계’가 그 작품. 여섯 번째 사랑 영화다. 쇼데를르 드 라클로의 프랑스 소설 ‘위험한 관계’가 원작. 로제 바딤 감독의 ‘위험한 관계’(1959)를 시작으로 스티븐 프리어스의 ‘위험한 관계’(1988), 밀로스 포만의 ‘발몽’(1989), 로저 컴블이 연출한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1999)까지 다양한 나라, 시대를 거쳐 영화화됐다. 이재용 감독의 한국판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도 있다.

말하자면 ‘닳고 닳은 이야기’다. 그럼에도, 허진호 감독은 ‘위험한 관계’를 택했다. 영화에 출연한 중국 여배우 장바이즈는 그런 그를 가리켜 “용기있다”라고 말했다. 허 감독도 위험한 선택이었음을 인정했다.

‘위험한 관계’는 허 감독의 전작과 맥을 같이 하면서도 궤를 달리하는 영화다. 다분히 허진호스러우면서 또 허진호 작품 같지 않다.

규모에서 오는 차이가 컸다. ‘위험한 관계’는 중국 제작사가 200억 원에 달하는 제작비 전액을 부담해 허 감독에게 연출을 의뢰했다. 전체 300여 명 가운데 한국 스태프는 고작 30여 명. 뚜펀위(장쯔이 분)에 대한 셰이판(장동건 분)의 유혹이 시작되는 대저택 세트를 짓는 데에만 2000만 위안(한화 약 35억 원)이 들었다. 커트가 빨라졌고, 클로즈업도 늘었다. 허 감독은 “커트 수가 이전에 만든 영화 전부를 합친 것만큼 많았다”고 말했다.

“처음 찍어보는 대작에 시대극. 그동안 영화에서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했다면 이번엔 삼각관계, 그 주변인물로까지 감정선을 확대했어요. 세트 작업도 처음 해보는데 개인적으로 공부가 많이 됐네요.”

‘위험한 관계’는 사랑을 가지고 위험한 게임을 하는 세 남녀의 이야기다. 감독은 시대적 배경을 1930년대 상하이로 옮겨왔다. 허 감독은 “생소하지만 어딘지 현 시대와 닮아 있는 공간에 끌렸다”고 했다.

영화 ‘위험한 관계’의 장면들.
“원작 소설은 프랑스 혁명 전야를 배경으로 당시에 사랑이라는 것을 게임으로 여기고, 그것을 즐기는 귀족들을 풍자하며 쓰여졌어요. 그런 소설적 배경을 상하이로 가지고 온다는 것이 매력적이었죠. 당시 상하이도 굉장히 화려하면서 퇴폐적이었거든요. 꽃 화(花)자를 쓴 ‘화화공자’란 말이 유행했을 정도예요. 장동건이 연기한 극 중 셰이판 같은 돈 많은 바람둥이 도련님을 뜻하죠. 전쟁을 앞둔 불안한 심리도 있었고요.”



장동건-장바이즈-장쯔이로 이어진 캐스팅은 뜻밖에 순조로웠다. ‘위험한 관계’는 그들에게도 도전이었다. 반듯한 신사 이미지의 장동건은 ‘나쁜 남자’ 역할을 중국어로 소화해야 했고, 장바이즈는 처음으로 악역에 도전했다. 장쯔이는 데뷔 초기 작품인 ‘책상 서랍 속의 동화’에서와 같은 순수한 얼굴을 10여 년 만에 다시 보였다.

“장쯔이를 먼저 만났는데 화려한 ‘모지에위’를 택할 줄 알았더니 뜻밖에 정숙한 ‘뚜펀위’를 해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장바이즈도 실제 자신과 많이 닮은 것 같다며 ‘모지에위’에 끌려 했고요. 장동건은 정형화된 틀을 깨고 싶어 했어요. 의도하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모두가 변화를 원했던 셈이죠.”

제작 방식도, 함께하는 사람도 달라졌지만 허 감독은 여전히 ‘사랑’을 말한다. 영화 속 격한 감정들이 그의 섬세한 손을 거쳐 품격이 다른 멜로로 다듬어졌다. 허 감독은 “지겨운데 재밌다”고 10년 넘게 이어온 ‘멜로’와의 동거를 이야기했다.

“지겹다 하면서도 찍다 보면 재밌으니 묘하죠. 희로애락이 다 드러나잖아요. 첫 만남의 설렘, 사랑에 빠진 순간의 행복, 배신을 당했을 때의 슬픔, 이별한 뒤의 추억까지.”

“차기작도 멜로냐?”고 물었더니 “아무리 재밌어도 이젠 정말 끝”이라며 웃는다.

“다른 거 해보고 싶어요. 코미디나 전기 영화 같은. ‘위험한 관계’에 의도적으로 웃기는 장면을 좀 넣어봤는데 관객 반응이 생각보다 좋던데요? 소질이 있는 거 아닐까요? 하하하”

(사진=권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