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철 "내친김에 영어로 미국을 웃겨 볼까해요"
by조선일보 기자
2008.07.05 12:23:55
[조선일보 제공] 개그맨 김영철 씨(34)가 요즘엔 영어로 웃긴다. 5년 전 캐나다 몬트리올 코미디 페스티벌에 갔다 자극 받고 영어 잘하는 동료에게 무시당하며 느낀 설움 때문에 시작한 영어공부가 어느덧 그의 경쟁력이 됐다. 유학 한번 안 가고 외국에 살아본 적도 없이 한국 영어학원 다니며 키운 실력이다.
4년 반 동안 학원에 다니며 독하게 익힌 영어는 김씨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자기 공부법을 담은 '뻔뻔한 영철영어'란 책을 냈다. 라디오 영어회화 코너를 진행하기도 했다. 아리랑TV에서 영어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프로까지 담당하게 됐다. 그를 여의도에서 만났다.
―영어로 뜰 줄 알았어요?
"제가 영어로 먹고살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저보다 영어 잘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잖아요. 이건 틈새시장이었어요. 개그맨 중 정선희 , 조혜련 선배가 일본어를 하는데 영어 하는 사람은 없었잖아요. 요즘엔 영어공부 하는 게 알려지면서 부담이 되긴 해요."
―'영어 하는 개그맨'이 그렇게 귀해요?
"이 바닥에서도 유일하면 살아남더라고요. 얼마 전 이경규 선배가 영어공부 하겠다는 후배에게 '중국어를 해라. 영철이가 영어 하는 데 5년 걸렸다는데 네가 5년 걸려 영어 하면 그때 쟤는 더 잘하지. 그러니 중국어 배워라'고 하시더라고요."
김씨는 요즘도 일주일에 세 번 영어학원에 다닌다.
"제 지론이 발품입니다. 남이 가봤는데 좋더라 이런 말 안 믿어요. 제가 꼭 가봐야 돼요. 요즘도 학원을 다지는데 숙제가 많아 이렇게 다 틀리면서 영작을 한다니까요."
―영어로 인터뷰도 하세요?
"하지요. 한국말 못 하는 영자신문 기자를 만난 적도 있고요. 제 영어 실력 테스트하느라고 만나자마자 영어로 질문해서 저를 당황시킨 기자도 있었어요."
―그럼 이제부터 영어로 대답해보실래요?
"에이, 어떻게 저 혼자만 영어로 해요."
말은 그렇게 해놓고 김씨는 거침없이 영어로 말했다. 영어로 방송한 동영상과 라디오의 영어회화 코너를 통해 실력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진짜 자신있고 자연스러운 영어였다. 열심히 하면 한국에서도 이렇게 영어를 할 수 있는데 어학연수를 왜 가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의 유창한 영어를 잠시 진정시키고 우리말로 인터뷰를 계속했다.
―학원 가는 것 말고 하루에 몇 시간씩 공부해요?
"두 시간 정도요. 2003년 9월부터 2006년 초까지 오전 7시 반부터 세 시간 영어 강의 듣고 수업이 끝나면 외국인들과 같이 밥 먹었어요. 그렇게 1년 하니까 귀가 트였어요. 1년 반이 넘으니 입이 트이고, 술 취한 날엔 말이 막 쏟아졌어요. 불행히도 요즘은 처음 공부할 때의 열정이 안 생겨서 다시 학원 다니는 거예요."
―무엇이든 그렇게 끈질기게 합니까?
"제가 스스로 놀라는 게 두 가지 있어요. 담배 끊은 지 3년 된 것, 영어공부 하며 여기까지 온 거예요. 원래 아침 잠도 많고 게을러요. 그런데 요즘엔 '나도 한번 빠져들면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요. 저를 키운 건 8할이 입방정이에요. 영어공부 한다고 공표했으니 약속을 지켜야지요."
―영어로 말문 트이는 건 어떻게 시작됐어요?
"암기해놨던 게 어느 날 쏟아지더라고요. 스크랩하고 달달 외웠던 문장이 입에서 나오는 거예요. 영화배우 니컬러스 케이지와 숀 펜이 싸웠는데, 숀펜이 '내가 말을 막 해서 항상 문제'라는 식으로 한 말이 있거든요. 그게 마음에 들어서 외워뒀다가 영어선생에게 써먹었지요. 선생이 그 말 듣고 놀라더라고요. 그 후엔 그 표현이 제 것이 됐어요. 저는 영자신문 보다가도 좋은 표현 보면 다 외워요."
―이젠 미국 사람들을 웃길 작정이라면서요?
"미국서 활동하는 영화배우 김윤진 씨 매니저와 통화했어요. 학원 영어에만 익숙한 제 입장에선 그 매니저의 말이 너무나 빠른 거예요. 잘 못 알아들어서 대화가 잘 안 됐는데, 제가 '전화영어 공포증이 있다'고 했더니 그 사람도 웃긴 웃었어요. 그러면서 '네 영어, 나쁘지는 않아. 그렇지만 코미디 하려면 영어를 어느 정도 해야 하는지 알지?'라고 물어요. 어쨌든 제가 어떻게 웃기는지 보고 싶다고 해서 동영상을 만들어 보내려고요."
―미국인을 웃기려면 영어도 영어지만 그들의 유머 감각을 이해하는 일이 더 어려울 것 같아요.
"저는 역으로 생각했어요. 미국에서 동양인이 주인공인 '히어로즈(Heroes)'란 드라마도 떴고 동양인 비중도 늘고 있으니까요. 4년 반 공부해서 미묘한 뉘앙스까진 모르지만 그래도 제가 영어로 웃길 줄 아는 감각은 있다고 생각해요."
―영어 덕분에 더 큰 무대를 꿈꾸게 됐네요.
"미래의 꿈을 믿는 스타일이라서요.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해보고 싶어요. 미국에 진출할 방법은 많다고 그래요. 레퍼토리만 많으면 되는 거지요. 내후년쯤엔 미국 가서 커뮤니티 칼리지(2년제 대학) 다니며 오디션도 보고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싶어요."
―영어학원 수없이 다니면서도 좌절한 사람들에게 영어 잘하는 비법 좀 가르쳐주세요.
"매일 공부해야 하고 큰 소리로 말하고 많이 틀리는 거죠. 유창함은 다음 문제예요. 2월에 뉴욕에 갔었는데, 미국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그 사람들이 '뭐(what)?'라고 하면서 다시 묻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잘하고 있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개그맨이니까 언어 감각이 좋고 표현력도 뛰어나서 외국어 하는 데 더 유리할 것 같아요.
"제 영어는 감으로 때려잡는 영어예요. 분위기 보면 딱 아는 재주가 있거든요. 미국 드라마 중에선 '위기의 주부들'이 좋았어요. 아줌마들 영어가 어찌나 와 닿는지! 그런데 아직도 시제(時制)가 왔다 갔다 해요."
―남을 웃기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어요?
"요즘엔 주로 영어로 웃기니까 영어 하다가 생긴 에피소드도 있고, 실생활에서 얻는 거지요. 많이 돌아다니고 읽고 보고 남 이야기 듣는 게 다 자산이에요."
―영어 배울 땐 뉴스보다 드라마가 더 도움이 된다고 했지요? 부시 대통령에게 영어 배우는 것보다 멋있는 배우에게 배우는 게 낫다고요.
"드라마, 미국 잡지, 영어교재가 다 도움이 돼요. 1년 4개월째 '전화 영어 레슨'을 하루 10분씩 하는데 힘이 돼요. 제가 영어법 특강을 가보면 전화영어 3개월 해봤는데 효과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도 예전에 저런 생각으로 공부했겠지 싶어요. 3개월에 외국어가 되면, 3개월 일본어, 3개월 스페인어, 3개월 영어 공부 해서 1년 안에 다 끝내게요?"
―'영어 하는 개그맨'이 되면서 더 유명해졌지요?
"개그맨 시작한 지 10년 됐는데 인기는 마음에서 내놨어요. 그래도 유일하니까 살아남잖아요. '모든 개그맨들이 영어를 잘하는데 너까지?' 그러면 의미 없지만 그건 아니니까요. 저는 저대로 가는 거지요."
―영어공부하기 싫은 사람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미국의 시인 마야 안젤루가 오프라 윈프리쇼에 나와서 그랬어요. '네가 뭘 바꾸고 싶으면 바꿔. 바꿀 수 없으면 네 태도를 바꿔. 불평하지 마.' 제가 이 말을 달달 외웠어요. 영어를 배워야 한다면 하자. 재미있게 하면 되잖아. 왜 투덜대니? 영어 등지고 살 수 있으면 그렇게 살자. 하지만 그렇게 살 수 없다면 구시렁대서 뭐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