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게릭' 박승일 코치 "좋겠다. 농구할 수 있어서..."
by노컷뉴스 기자
2007.10.02 10:08:46
[노컷뉴스 제공] '루게릭(신체근육이 굳기 시작해 죽음에 이르는 근위축성측색경화증)'이라는 생소한 병명과 함께 코트를 떠난지 5년. 코트 위 당당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눈빛 만큼은 여전했다. 안구마우스를 사용하는 그와 e메일로 진행한 인터뷰를 마무리하기 위해 찾은 박승일 전 모비스 코치(36). 비록 말은 할 수 없었지만 그의 눈은 많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박승일 전 코치는 KBL(한국농구연맹)에서 전무후무한 기록들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만 31살이었던 2002년, 모비스 코치로 선임되면서 KBL 역대 최연소 코치로 기록됐으며 신장 202cm의 역대 최장신 코치, 그리고 4개월만에 벤치에서 물러난 역대 최단기간 코치라는 것.
그의 말대로 미국 유학 중 최희암 모비스 감독(현 전자랜드 감독)의 호출을 받아 코치로 선임된지 4개월만에 그는 루게릭병의 빠른 진행으로 코트를 떠나야 했다. 이후 그의 몸은 서서히 굳어갔고, 이제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눈동자 뿐이다.
그러나 그의 농구 사랑은 여전하다. 오는 18일 개막하는 2007~2008 프로농구 시즌을 그 누구보다 기다리는 주인공이다. 누워있지만, 매 시즌 프로농구 전 경기를 모두 챙겨본다는 박 전 코치다. 절친했던 연세대 동기 문경은(SK)이나, 후배 이상민(삼성), 우지원(모비스) 등이 좋은 활약을 펼치는 날은 자신이 플레이한 것 마냥 신나한다고 가족들이 귀뜸한다. 이제 그의 갸날픈 손은 농구공을 만질 수 조차 없지만, 그들의 활약을 통해 자신만의 플레이를 그리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병마가 그의 발목을 잡지 않았다면 그는 어떤 지도자가 됐을까. 이에 대해 그는 "혹자는 내가 완벽을 추구하는 코치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난 자상한 형 같은 그런 지도자가 되어있지 않았을까… 희망사항이다"며 '만약'이라는 가정하에 멋진 지도자가 된 자신의 모습도 그려본다.
'농구팬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돌아온 그의 답 역시 농구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묻어났다.
"좋겠다. 그 재미있는 농구를 할 수 있어서, 농구공을 만지고 느낄 수 있어서, 박진감 넘치는 경기장에서 선수들과 같이 호흡할 수 있어서…."
"그 힘든 농구를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애가 안 아프지 않았을까요?" 칠순을 앞둔 그의 어머니 손복순씨(66)의 눈물섞인 한 마디다.
박 코치는 늦깎이 농구선수였다. 서대전 초등학교 4학년때 큰 키로 인해 농구팀에 발탁됐지만 부모의 반대로 곧 팀을 나왔다. 그러나 대성중 2학년때 부모를 끈질기게 설득해 대전중으로 전학을 감행, 다시 농구공을 잡았다. 손씨는 "키는 컸지만 체력이 안되서 농구하는 내내 힘들어했었다"고 말한다. 아들의 아픔이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다며 눈시울을 붉히는 어머니다.
어머니는 그가 세상과의 연을 끊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다. 박승일 전 코치는 2004년 5월 호흡 곤란이 왔을 당시 혀를 깨물어 심폐소생술로 가까스로 살아났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님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드릴 수 없다"는 마음은 그와 세상을 연결하고 있다.
박 전 코치는 최근 자신을 24시간 간병하는 어머니를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두 누나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 몰래 실내 헬스자전거를 주문한 것. 어머니가 환불할 수 없도록 편지도 썼다.
"하루 24시간을 내게 매달려 엄마 건강에 무심한 걸 보면 전 피가 거꾸로 솟아요. 엄마가 내곁에서 간병하시는 시간을 줄여보고 싶지만 분명히 거절하실 테니. 그래서 내가 내린 처방은 실내 자전거 타기. 돈 아깝다 말하지 말고, 몇날 며칠을 생각해서 산거니까 아무말 하지마."
루게릭병으로 그는 많은 것을 잃었다. 20년간 해오던 농구를 비롯해 사랑하는 아내까지. 그러나 이혼의 아픔 후 새로운 사랑도 찾아왔다. 일주일에 두번, 서울 신당동에서 박 전 코치의 집 경기도 수지까지, 왕복 3시간이 넘는 거리를 마다않고 찾아와 그를 행복하게 만드는 여자친구 김중현씨(33)가 그 주인공이다. 어렵게만 생각되던 박 전 코치와 의사소통을 척척 해내는 그녀 모습이 대단해 보인다.
버스에서 만난 김씨를 보고 한 눈에 반한 박 전 코치가 작업멘트를 날렸던 것이 14년전 일이다.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했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2005년. 어느날 핸드폰에 찍힌 박 코치의 "죽었니? 살았니?"라는 문자를 받고 그 길로 그에게 달려온 김씨는 요가 강사로 일하며 3년째 변함없이 병상을 지키고 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거란 얘기에 그녀는 잘라 말한다.
"살아오면서 선택의 기로에 선 적이 별로 없었어요. 하지만 오빠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었고,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해 감당해야할 부분은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행복하기만 한 걸요."
이처럼 박승일 전 코치와 어머니, 그의 여자친구까지. 결코 편할 수 없는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준 이유는 루게릭 전문 요양소 건립에 대한 박승일 전 코치의 간절함 때문이다.
치료비를 지원하고 수천억대 기금이 마련되어 있는 미국, 일본과는 달리 국내 루게릭병 환자 1,500여명은 현재 정부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오랜 투병으로 결국 가족의 생계를 위협하게 되는 것이 현실.
따라서 박 전 코치는 루게릭병을 선고 받은 2002년부터 모금운동 및 서명운동을 주도하며 전문 요양소 설립의 절실함을 호소하고 있다. 현재 루게릭 요양소 건립을 위해 모인 기금은 1억여원. 아직 갈길이 멀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는 언제나처럼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후원문의 http://cafe.daum.net/alswith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