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공모자들, 체육계 윤리의 문화적 구조를 묻다[스포츠리터치]
by이석무 기자
2025.12.01 09:5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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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칼럼니스트] 한국 체육계에서 폭력, 위계, 성비위 사건이 되풀이되고 있다. 지도자의 폭행, 학생선수에 대한 성적 착취, 합숙소 내 인권 침해는 어느새 익숙한 뉴스가 됐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제도 개선이 약속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직은 이전의 침묵으로 돌아간다. 결국 이러한 반복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문화적 구조 속에 내재된 반복성의 결과다.
체육계의 반복되는 비위와 폭력 문제를 이해하려면, 개인의 도덕성이나 규정 미비를 넘어선 구조를 보아야 한다. 규정은 존재하지만 윤리는 작동하지 않고, 제도는 강화되지만 사고는 멈춰 있다. 이 모순의 근원을 설명해주는 철학적 통찰이 있다.
독일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근원이 특별한 사악함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복종”에 있다고 보았다. 그가 본 나치 전범 아이히만은 괴물도, 광신자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 믿었다. 아렌트가 포착한 악의 본질은 인간의 도덕적 판단 능력이 행정적 순응으로 대체될 때 생겨나는 공허였다. 인간이 스스로 사고하기를 멈출 때, 제도는 윤리의 이름으로 폭력을 실행하게 된다.
지난 7월 미종결 상태 사건이 70건이 넘는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스포츠윤리센터로부터 징계 요청을 받은 각 경기단체는 ‘내부 검토 중’이라며 결정을 미뤘다. 그 사이 일부 지도자는 여전히 현장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피해자들은 오랜 시간 진술과 조사를 반복하며 심리적 2차 피해를 호소했다. 하지만 제도는 멈춰 있었다. 사건은 행정 절차 속에 매몰됐고, 윤리는 서류로만 존재했다.
9월에는 한 국가대표 코치가 선수들에게 상습적으로 폭언을 하고 훈련 중 폭행을 가한 사실이 드러났다. 해당 종목 협회는 ‘지도 방식에 대한 오해’라며 초기에 사건을 축소했고, 공식 징계는 언론 보도가 이어진 뒤에야 이루어졌다. 제도는 윤리를 지키기보다 ‘조용히 넘기는 것’을 선택했다.
이와 같은 사건들은 체육계 전반의 관성이다. 폭행이나 성비위가 발생해도, 기관은 ‘훈련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축소하고, 협회는 ‘조직의 명예’를 이유로 은폐하며, 학교는 ‘성적이 우선’이라며 침묵한다. 누구도 자신이 판단을 멈췄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폭력은 악의적 의도보다 복종의 습관에 의해 유지된다.
아렌트가 주목한 것은 괴물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춘 평범한 사람들의 시스템이었다. 그는 『악의 평범성』에서 인간이 스스로 사고하기를 멈추는 순간, 제도는 자신을 정당화하며 폭력을 낳는다고 했다. 이 말은 오늘의 체육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행정을 위한 규정, 조사와 징계의 형식은 존재하지만, ‘이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은 부재하다. 행정 담당자는 규정 해석에 몰두하고, 학교와 협회는 ‘조용한 해결’을 선호한다.
그 결과 악은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 일상화된다. 회의록의 문장, 보고서의 표현, “하던 대로 한 일”이라는 관행은 제도가 사고를 유예할 때 윤리가 얼마나 쉽게 무력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아렌트가 경고했듯, 악은 특별한 의도에서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음에서 자라난다.
아렌트의 통찰은 체육계 개혁의 방향을 제시한다. 윤리란 규정이 아니라 사유의 능력이며, 제도란 절차가 아니라 판단의 공간이다. 윤리가 서류 속에서만 존재할 때, 폭력은 언제든 제도의 이름으로 돌아올 수 있다. 체육계가 진정으로 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규정이 아니라 ‘이것이 옳은가’를 묻는 사람들이다.
체육계의 윤리 위기는 개인의 타락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유해온 도덕적 무사유의 문화가 드러난 결과다. 지도자의 폭력은 복종을 미덕으로 길러져온 제도적 체계의 산물이며, 선수의 침묵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언어의 질서’ 속에서 형성된 습속이다.
체육은 단순한 스포츠 시스템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권력 구조와 가치 체계가 응축된 문화적 장이다. 따라서 체육의 윤리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단지 규정을 고치는 일이 아니라 문화의 작동 방식을 다시 사유하는 일이다.
아렌트가 말한 ‘사유(thinking)’는 단순한 인식 행위가 아니다. 그에게 사유란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 즉 스스로의 행위를 성찰하고 타인의 관점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이었다. 그 힘이 사라질 때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도는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체육계의 윤리 부재는 바로 이 사유의 단절, 곧 인간적 상상력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오늘날 체육계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규정을 다듬기 이전에 공동의 세계를 다시 사유하는 능력이다. 지도자와 선수, 행정가와 관중이 서로를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존재’로 인식할 때, 비로소 윤리는 제도의 문턱을 넘어선다. 윤리는 처벌의 장치가 아니라 관계의 감각이며, 그 감각은 사유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체육계가 다시 인간의 존엄을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먼저 사유의 언어를 되찾아야 한다. “생각하지 않는 사회는 스스로 악을 조직한다”고 한 아렌트의 식견처럼 체육계의 개혁은 그 조직된 침묵을 해체하고 사유의 공론장을 복원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사유 없는 규율은 폭력을 낳지만, 생각하는 제도만이 윤리를 가능하게 한다.
이제 체육이 길러야 할 것은 근육이 아니라, 서로의 인간성을 인식하는 상상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