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 세대의 반란'...MZ세대 위대함 보여준 김은중호
by이석무 기자
2023.06.09 06:00:00
| 한국 축구의 새로운 기적을 쓴 한국 20세 이하(U-20) 축구대표팀.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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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 한국 20세 이하(U-20) 대표팀의 기적을 이끈 김은중 감독의 현역시절 별명은 ‘오뚝이’였다. 중학교 시절 공에 맞아 눈을 다쳤지만, 제때 치료하지 못해 왼쪽 눈 시력을 잃었다. 시야 초점이 잘 맞지 않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다. 그 결과 1990년대 이동국과 함께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이름을 떨쳤다.
#에콰도르와 16강전, 나이지리아와 8강전에서 잇따라 헤딩골을 터뜨렸던 센터백 최석현(단국대)은 키가 178cm에 불과하다. 원래 센터백은 190cm에 육박하는 장신들이 즐비한 포지션이다. 그런데도 두 골을, 그것도 장신 숲을 뚫고 머리로 성공시켰다. 체격의 열세를 빠른 발과 점프력, 그리고 굴하지 않는 투지로 이겨냈다. 한쪽 눈 실명에도 좌절하지 않았던 감독처럼.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2023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에서 기적을 이룬 김은중호는 대회 전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일단 스타플레이어가 없었다. 2017년 한국 대회에선 당시 바르셀로나 유스팀에서 뛰던 이승우(수원FC), 백승호(전북)가 있었다. 2019년 폴란드 대회에선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를 누비던 이강인(마요르카)이 활약했다.
반면 이번 대표팀에는 확실한 에이스가 없었다. 소속팀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선수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팀에서 경기에 꾸준히 나오는 선수는 배준호(대전시티즌) 한 명 정도였다. 오죽하면 김은중 감독이 “부족한 실전 경험이 걱정된다”고 했을까. 밖에선 이들을 ‘골짜기 세대’ 또는 ‘낀 세대’라고 불렀다. 높이 솟은 양쪽 봉우리 사이에 끼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비록 연령별 대회라고는 하지만 명색이 FIFA 주최 대회인데 취재진이 거의 가지 않았다. 개최지가 인도네시아에서 지구 반대편인 아르헨티나로 갑작스레 옮겨진 것도 있지만 그만큼 기대치가 낮았다는 의미다.
진정한 여행가들은 알고 있다. 산 정상보다 골짜기가 더 아름답고 편안하다는 것을. 김은중 감독은 “선수들이 잠재력이 있는데 인정받지 못하는 게 가슴 아팠다”면서도 “지금은 자기도 모르는 최고의 잠재력을 꺼내는 것 같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은중호는 스타가 없어도, 전력이 떨어져도,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가 온다는 것을 보여줬다. 매 경기 점유율에서 크게 밀렸다. 슈팅도 수없이 얻어맞았다. 심지어 우리가 2-1로 이겼던 프랑스와 조별리그 1차전은 슈팅숫자가 9대23이었다.
개인 기량 차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은중호는 물러서지 않았다.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촘촘한 협력수비로 상대 공격을 막았다. 그래도 뚫리면 몸을 던지는 육탄방어로 슈팅을 저지했다.
축구는 판정승이 없다. 90분 내내 계속 밀려도 결국 중요한 건 골이다. 어떻게 해서든 골을 더 많이 넣으면 이긴다. 김은중호가 그랬다. 한국은 대회 내내 ‘선수비 후역습’ 전술로 나섰다. 일단 선수 전원이 내려와 걸어 잠궜다. 버티면서 기회를 엿봤다. 공을 빼앗으면 스피드가 좋은 2선 공격수들이 뛰쳐나가 골을 노렸다.
김은중 감독이 공격을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비장의 무기는 코너킥, 프리킥 등 세트피스였다. ‘캡틴’ 이승원(강원FC)의 정교한 킥을 바탕으로 중요한 고비마다 세트피스 골을 이끌어냈다.
세트피스는 약팀이 강팀을 잡는 가장 좋은 무기다. 굳이 공을 계속 가지고 있지 않아도 상대 진영에서 한 방에 골을 만들어 낸다. 김은중 감독은 토너먼트 대회에서 세트피스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더 세밀하고 정교한 세트피스 전술을 마련했고 이는 대회에서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2003~04년생들이 모인 이번 대표팀은 스스로 동기부여를 만들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이겨야 할 이유를 찾고 도전했다. 우리 시대의 자랑스러운 MZ 세대의 강점을 여실히 보여줬다.
선수들은 대회 기간 내내 등번호 ‘18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벤치에 걸어놓았다. 경기 전 베스트11 공식 촬영 때도 그 유니폼을 들고 찍었다. 조별리그 2차전 온두라스전에서 헤더 동점골을 터뜨린 뒤 불과 4분 후 오른쪽 발목 골절 부상을 당한 박승호(인천유나이티드)의 유니폼이었다.
박승호는 눈물을 머금고 동료들보다 먼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선수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박승호는 휠체어를 타고 먼저 고국으로 떠났지만 마음은 동료들과 함께했다. 그의 유니폼은 대표팀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가 됐다. 승리 후 축제 현장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골짜기 세대’로 무시당했던 이들은 한국 축구의 새로운 미래로 다시 태어났다. 이제는 이들이 잘 성장하도록 보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이들이 소속팀으로 돌아가면 다시 벤치 신세로 전락해 경기에 못 나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한 축구 관계자는 “젊은 선수들이 소속팀에서 출전 기회를 많이 얻지 못하다 보니 잠재력을 꽃피우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며 “연령별 리그 등 경기력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