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불패의 병법](9)'전원 야구' 집중과 분산을 꾀하다

by정철우 기자
2011.01.30 08:44:30

[이데일리 SPN 정철우 기자] 준비는 끝났다. 이젠 전쟁이다.

형(形)이라 함은 적과 대치한 가운데 전력을 배치한 상태를 말한다. 손자는 그 배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유.불리가 갈린다고 했다.

공격의 방법이 하나 뿐이라면 어지간한 힘으로는 상대를 이기기 힘들다. 상대도 이미 그 방식에 대한 대비가 돼 있기 때문이다. 적이 어느 곳을 막아야 할지 알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방법을 만들어 냈을 때 전쟁을 유리한 흐름으로 이끌 수 있다. 형을 자유롭게 만들 때 같은 수의 병력으로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SK의 토털 베이스볼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SK는 한 경기서 가장 많은 선수를 기용하는 팀이다. 그들의 야구는 ‘전원야구’라 불릴 수 있다. 특정한 한.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폭 넓은 기용 안에서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SK 야구다.

▲ 지난 2008년 KS 3차전 마지막 장면. 9회말 1사만루서 1루수로 나선 이진영이 뒤로 빠지는 공을 어렵사리 잡아내고 있다. 그의 원래 포지션은 우익수. 그러나 SK 토털베이스볼은 그를 1루수로도 강하게 키워냈다. 사진=SK 와이번스

처음부터 ‘토털 베이스볼’이라는 테마로 팀을 만들어 간 것 이라고 하긴 어렵다. 전력을 끌어올리고 팀의 정신을 건강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강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을 찾아낸 것이다. 팀의 전력 상황에 맞춰 다양하고 유연하게 공략법을 만들어가는 김성근 감독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정준 코치는 “무엇이 먼저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처음부터 토털 베이스볼을 목표로 했다기 보다, 전력상 업그레이드가 필요했고 베테랑과 신예를 상관하지 않고 전 일정의 80%를 120%로 해내기 위해 팀 전체 전력층을 두텁게 가져가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토털베이스볼이 자리잡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성근 감독이 처음 팀을 맡을 당시 SK는 전체적인 전력의 균형이 무너져 있었다. 주전과 비주전의 기량 차이가 컸던 것이 가장 큰 문제. 든든한 주축 선수들을 보유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힘 만으로 우승을 노리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그저 백업에 머물러 있던 선수들의 기량을 끌어올리는 것이 첫번째였고, 개인이 아닌 팀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정신력을 만드는 것이 두번째 목표였다.

이 과정에서 김강민 박재상 조동화 최정 등 새로운 피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국민 우익수’로 칭송 받던 이진영도 팀에 따라 수비강화 필요성이 있으면 경기 후반에도 교체됐다. 그가 1루수를 겸업해야 했던 것은 SK가 추구하는 야구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사례다.

A라는 팀을 상대로 특히 강정을 지닌 갑이라는 타자가 있다. 하지만 포지션이 겹쳐 좀처럼 기용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어렵다. 이때 갑 혹은 그와 포지션이 겹치는 다른 선수가 또 다른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다면 그 팀은 상대를 공략할 수 있는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그런 SK를 상대해야 하는 팀은 마크해야 할 지점이 늘어나게 된다. 손자병법에 설명된 부분, “나는 집중되어 다수가 되고 적은 분산되어 소수가 되어 바로 다수로 소수를 공격하는 셈이 되니 내가 상대하는 적의 부분은 정해져 있다. 적은 앞을 수비하고자 하면 뒤가 약할까 염려하게 되고 왼쪽을 강화하면 오른쪽이 약하다는 걸 걱정하게 된다. 결국 모든 곳이 약해진다”는 병법이 여기에 해당한다.

SK의 라인업이 단순히 상대 투수 유형(좌.우)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상대 특성을 보다 세밀하게 따진 뒤 그에 대한 맞춤형 라인업을 기용, 활로를 만들어낸다.

대표적인 예가 좌타자 중심인 팀을 상대로는 수비가 좋은 1루수가 주로 기용된다는 점이다. 상대 투수가 좌투수일 경우라도 박정권이 1루수로 자주 기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삼성을 상대로 1루수를 어떻게 기용되는지 유심히 지켜본다면 SK 야구가 갖고 있는 하나의 흐름을 잘 엿볼 수 있다.



개인적인 기량 향상이 빠르게 이뤄지지 못했다면 토털 베이스볼은 오히려 팀의 정신력을 흐트러트리는 악재가 될 수도 있었다.

김경문 두산 감독이 지적한 것 처럼 선수들은 기용문제에 대해 이기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내가 빠지고 다른 선수가 나섰을 때 좋지 않은 결과가 계속된다면 심리적으로는 하나가 되기 어려워진다.

SK는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먼저 일정 수준의 기량을 이뤄냈다. 그 바탕이 만들어진 뒤 다양한 맞춤형 시도를 통해 승률을 높여갔다. 내부적으로 토털 베이스볼은 팀의 전력과 정신력을 모두 강하게 만드는 힘이 됐던 것이다.

상대에겐 그만큼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대비할 카드가 많은 팀을 상대해야 하다 보니 힘을 집중해 대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시리즈가 시작되기 전 삼성 안방 마님인 진갑용은 “SK는 워낙 마크해야 할 부분이 많다보니 대비하기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시리즈가 4경기만에 끝난 뒤 선동렬 전 삼성 감독 역시 “SK 야구는 잘 모르겠다. 미국 야구도 아니고 일본 야구도 아니다. 선발 투수도 따로 없는 것 같다”며 허무한 웃음을 지어보이기도 했다.

토털 베이스볼은 가진 것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는 효과도 지니고 있다. 상대팀에게 이미 SK는 ‘뭔가 또 다른 수가 있는 팀’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 있다. 그런 경계심은 상대를 지치게 하고, 필요 이상의 대비를 하게 만든다. SK의 별 뜻 없는 움직임 하나가 상대에겐 또 다른 부담이 되는 것이다.

마해영 XTM 해설위원은 “SK와 경기를 하면 우리가 힘에서 크게 밀려 졌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이름값이)대단한 선수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가 끝나면 우리가 져 있다. 대신 워낙 다양한 방법으로 공략을 해오니 정신이 쏙 빠지는 느낌이 든다. 그런 것들이 반복되면서 두려움이 생기게 된다”로 분석했다.

하지만 SK 역시 조금씩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SK가 어떻게 야구하는지에 대해선 상당 부분 노출이 돼 있다. 상대의 준비도 그만큼 성숙한 단계다.

특히 투수 부문이 그렇다. 그들이 가는 길은 이제 어느정도 상대에게 노출됐다고 봐야 한다.
 
지난해 8월1일 KIA이종범은 KIA를 상대로 10연승을 달리고 있던 SK 에이스 김광현을 홈런 포함, 2안타 3타점으로 두들기며 무너트렸다. 경기 후 그는 “광현이는 좋은 투수지만 패턴은 이제 우리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안다고 다 되는 건 아니지만 같은 패턴이라면 그만큼 우리도 이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넥센의 중심인 이숭용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2010 시즌이 시작되기 전 “SK엔 새 얼굴이 없다. 매일 던지던 투수가 올라오니 분석이 대체로 끝났다. 선발이 특히 강하다는 인상이 없다. 해볼만한 전력이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넥센이 유독 SK전서는 강한 느낌을 준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투수가 새로운 대응 방식을 찾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구종 하나를 추가하는데 2,3년이 걸린다. 그 후에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도저히 손에 익지 않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립을 잡고 던질 수는 있지만 실전에 쓸 만큼 자신감을 갖기 위해선 꾸준한 훈련이 뒷받침 돼야 한다.

김성근 감독이 선수들에게 끊임 없이 재도전과 재도약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정준 코치는 “좋은 예가 지난해 챔피언십시리즈 대만전이다. 우리 전력이 100%가 아니었던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상대팀이 우리를 너무 잘 알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팀 전력분석팀이 내리 4년째 한국시리즈를 정탐했다고 하더라. SK만 4년째 본 것이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잘 준비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미 상대에 형(形)이 노출되면 그만큼 경기 풀어가기가 어렵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