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만에 '맨손 소 잡기' 비화 밝힌 천규덕씨

by조선일보 기자
2008.10.20 08:11:11

▲ 1970년대 초 천규덕 선수가 장충체육관에서 맨손으로 소 를 때리는 모습.

[조선일보 제공] 천규덕은 '박치기왕' 김일, '백드롭의 명수' 장영철과 함께 1960~70년대 인기스포츠였던 프로레슬링의 대표 스타였다. 검은 타이즈를 입은 그가 '얍' 하는 기합과 함께 당수로 일격을 날리는 장면에 국민들은 일희일비했다.

서울 종로구 프로레슬링 동우회 사무실에서 천씨를 만났다. 이 왕년의 스타는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는 강의하듯 답변했고 "레슬링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여러 번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프로레슬링 인기가 대단했죠?

"경기 있는 시간에는 택시도 안 다녔어요. 장충체육관에 암표상이 활개쳤고 TV가 있는 만화가게와 다방도 사람들로 꽉 찼어요. '일주일에 한번씩 경기를 해달라'고 대통령 경호실에서 연락이 왔을 정도야. 일본 선수와 경기할 땐 관중들이 '쥑이라, 쥑이라'고 하는데 그 소리 들으면 하늘에 뜨는 기분이죠."

―한창 때 장충체육관에서 맨손으로 소를 잡기도 했죠? 그때 수십 번 내리쳐도 소가 안 쓰러지고 버텼다면서요.

"당시 김일 선수가 박치기로 인기를 끌었어요. 국내파도 뭔가 보여줘야겠다 싶어 '소를 잡자'고 생각한 거지. 아이디어는 냈지만 막상 '진짜 맨손으로 잡을 수 있을까' 싶어 마장동 소 도축장에 가서 연습 삼아 한번 해봤어요. 그랬더니 한 대에 소가 확 가더라고요. 거기 있던 사람들이 다 놀랐지. 연속해 5마리를 때려 잡았어요. '아, 이거 되겠다' 싶어서 장충체육관 잡고 대대적으로 광고를 했어요."

그런 천규덕에게 시합 이틀 전에 연락이 왔다.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치게 한다는 중앙정보부였다. "천 선수, 왜 하필 소를 잡으려 해, 소가 뭔지 알아? 공화당 상징이 황소라는 거 몰랐어? 당신이 황소 때려잡으면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않겠어?" 그 말에 천규덕은 소름이 쫙 끼쳐 "정치고 뭐고 잘 모른다"고 우물거렸다.

정보부는 "이미 광고 다했는데 국민들에게 거짓말 할 수는 없고, 단번에 때려잡지 말고 최대한 시간을 오래 끌어서 황소가 센 동물이라는 걸 보여달라"고 제안했다. 천씨는 "나야 단번에 쓰러뜨릴 수 있었지만 그 말 듣고 열 몇 대로 힘을 나눠 때리다가 막판에 가서 쓰러뜨린 거라. 시키는 대로 한 거지"라고 했다.

―김일 선수와는 사이가 안 좋았나요?

"스타가 둘 되고 셋 되면 장사가 안됩니다. 1인자가 김일이고 나와 장영철이는 2, 3인자였지. 그때 레슬링에는 스타가 필요했고 마침 김일이 일본에서 들어왔어요. 우리가 이 사람을 스타로 만들어줬지. 스타가 된 사람이 그 밑의 선수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김일은 그게 부족했어."

그는 "부산에서 태권도(당시 '당수'로 불림) 사범을 할 때 동네 전파사 앞에 서서 역도산의 경기를 보고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나도 역도산처럼 당수를 하니 저렇게 한번 해보자 싶었지. 같은 체육관의 장영철과 함께 시작한 거예요. 나중에 일본 선수를 부르니 사람들이 열광을 하더라고."

1963년 역도산이 잠시 귀국했다. 소식을 들은 프로레슬러들이 숙소인 조선호텔 앞으로 달려가 도열했다. "역도산이 한 사람씩 악수를 했는데 내 손을 잡더니만 '이 선수 일본에 데려가겠다'하더라고요. 기뻐서 연락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해 역도산이 칼에 맞아 숨졌어요."

―레슬링은 쇼인가요? (1965년 5개국 친선 프로레슬링 대회에서 난투극을 벌인 장영철이 경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레슬링은 쇼'라는 보도가 나면서 파문을 일으켰다.)

"그때 현역 선수가 '레슬링은 쇼다' 해버렸으니…. 짜고 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때릴 때 정식으로 때리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안 다치게 때리는 거, 그게 기술이에요."



―맨주먹으로 돌멩이도 깼다면서요.

"본고장 기술을 배우려고 1966년에 미국에 갔어요. 도착하니까 현지 관계자들이 '당신 기술이 뭐냐'고 물어요. 그래 '시합하는 날 돌멩이 하나 갖다 달라'고 했어요. 시합 전에 내가 맨손으로 돌을 작살냈어. 태권도가 미국에 상륙하기 전이니까 그 쪽에서 안 놀랄 수가 있겠어요?"

―인기가 좋았으니, 돈도 많이 벌었죠?

"우리 그 얘긴 하지 맙시다. 복싱은 챔피언 한 사람이 많이 가져오지만 레슬링은 식구가 많잖아요. 벌어서 다 나눠야 돼요. 그런 건 기사에 쓰지 말고 그냥 많이 벌었다 하세요."

―은퇴 이후엔 어떻게 지냈어요?

"나는 아직 공식 은퇴한 게 아니에요. 1985년 이후 링에 오르진 않았지만, 아직 은퇴는 안 했어. 프로레슬링을 화려하게 부활시키고 할 겁니다."

―그럼 '링 떠난 후에' 어떻게 지냈어요?

"영진약품에서 정년 퇴임할 때까지 근무했어요. 제대하자마자 입사해서 퇴임까지 24년간 근무한 회사예요. 당시 김생기 회장님이 정식으로 채용해줘서 선수로 뛸 때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훈련을 했지. 퇴직 후 친구와 건축업에 손댔는데 2~3년 하다가 잘 안됐어. 1998년 신한국프로레슬링협회 프로레슬링 동우회를 만들었어요."

―동국대에선 뭘 강의하실 건가요?

"한국 프로레슬링의 역사, 시합할 때 선수들의 마음가짐, 어떻게 해야 선수가 팬들하고 교감이 이뤄지는지, 다 말할 겁니다. 어떤 사람이든 조직 속에서 사는 거고, 그 조직체에서 뻗어나가는 거 아닙니까. 회사 조직·군대 조직 등 많은데, 깡패 조직만은 되지 말라고 강조하고 싶어요."

―레슬링 인기를 어떻게 부활시킬 수 있을까요?

"요새 미국프로레슬링(WWE) 굉장하잖아요? 하루에 1200만달러 벌어들인답니다. 요즘 젊은 애들은 선수들 이름을 나보다 더 잘 알고, 기술도 다 꿰고 있어요. 그 마니아가 한국에 200만명 된다는데, 그 인구를 흡수시키려면 우리도 스타를 빨리 만들어야지."

천씨의 큰 아들이 탤런트 천호진이다. 아들의 연기에 대해 그는 "카리스마도 있고, 몸짓도 목소리도 아주 좋다"며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저만하면 배우 소리 듣겠다 싶다"고 했다.

"김일 형님도 돌아가시고, 1세대 중 나만 남아 쓸쓸합니다. 전화해서 형님 잘 있나 하면 마음이 좋겠는데…. 나도 이제 얼마 안 남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면서도 그는 "지금도 하루 3시간씩 운동하고, 아침 저녁에 2000번씩 팔 굽혀 펴기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