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 감독, "나는 여전히 건강한 좌파"(인터뷰)

by장서윤 기자
2011.03.24 08:04:27

▲ 장진 감독

[이데일리 SPN 장서윤 기자] "한국영화에서 `판타지`는 사실 충무로에서 약간 금기시되는 부분이 있어요. 판타지는 `허무맹랑하다`는 인식이 있으니까요. 근데 깡다구를 한번 부려봤죠"(웃음)

장진 감독의 열 번째 연출작 `로맨틱 헤븐`(24일 개봉)은 착하면서도 나름의 울림이 있는 영화다.

천국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낸 민규(김수로), 암 투병중인 엄마를 위해 골수 기증자를 찾아 나서는 미미(김지원), 미미의 엄마를 살릴 수 있는 지명수배자를 쫓는 김형사(임원희), 평생 가슴에 묻어둔 할아버지의 첫사랑을 찾아 나서는 지욱(김동욱) 등 영화 속 다양한 인물들은 각자의 목표를 향해 고군분투하며 서로 얽히고 설키는 인연을 만들어 간다.

굵직한 줄거리에 집중하기보다 연극적인 연출의 토대 위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연기의 맛을 살리는 장 감독 특유의 내공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김동욱 심은경 등 나이 어린 배우들부터 이순재 이한위 김수로 등 중견 연기자들까지 배우들의 폭도 넓다.

장 감독 또한 "배우들 덕을 많이 봤다"라며 "사실 영화 속에 치열한 갈등이 있는 게 아니라 다소 산만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배우들이 잘 해준 것 같다"며 만족감을 표한다. 특히 몸은 소녀지만 내면은 죽음을 앞둔 할머니로 분한 심은경에 대해서는 "그 나이에 그 정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배우는 없다고 단언할 정도로 보석같은 느낌의 배우"라며 칭찬했다.

▲ 장진 감독
영화에는 땅 위 세상보다 좀더 평화롭고 동화적인 느낌이 드는 천국이 주요 무대로 나오는 점이 인상적이다.

"천국은 나른한 듯 하면서 사람이 가장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는 장 감독은 "어떤 이들에겐 실제 본인들이 경험했던 이별이나 공감가는 얘기일 수 있을 것"이라며 영화의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한국전쟁의 소용돌이를 두 남녀의 사랑이 피어난 공간으로 설정한 부분은 "우리 민족이 저지른 가장 우매한 짓이자 가장 아픈 역사라고 생각하는 한국 전쟁을 돌아보면 늘 많이 안타깝다는 생각"이라며 "그 역사 안에서 낭만도 찾아보고 싶고, 왠지 껴안아 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상상해 본 부분"이라고 들려주었다.

앞서 자신이 각본을 쓰고 제작한 `웰컴 투 동막골`에 이어 민족 화해의 메시지 등이 살짝 가미된 것은 "사실 대중 영화 안에서 정치적 노선이나 나만의 목소리를 내기는 어렵지만 나는 여전히 건강한 좌파"라며 웃음지었다.

또 평생 사랑을 간직하고 사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영화 속 주요 줄거리로 가미한 데 대해서는 "부모 세대에 대한 애틋함은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부분"이라며 "전쟁 속 짧은 기간에도 사랑이 꽃피고 이후 50년간 잊지 못하는 사랑으로 간직할 수도 있지 않겠나"라고 전했다.

연기 경험이 전무한 신예 김지원을 여주인공으로 과감하게 기용한 것도 스스로는 굉장히 만족스럽다.

장 감독은 "기존의 무게감 있는 배우들을 만나다 차라리 신인 위주로 가자는 마음이 들어 미팅을 했는데 말하는 소리나 눈이 좋았다"라며 "내심 신인연기상 욕심도 날 정도" 라고 평했다.



▲ 장진 감독

사실 이 작품의 시나리오가 나온 것은 이미 4년 전. 당시 스릴러 영화의 열풍 속에서 당초 40억원 가량의 제작비를 예상했던 `로맨틱 헤븐`의 영화화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장 감독은 "예산을 확 줄인 20억원대로 영화를 마무리했는데 관객들에게는 더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지 못해 좀 미안한 마음이 있다"라며 "그래도 배우들이 지분 참여를 하는 등 십시일반으로 도와줘서 무사히 끝마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연극 연출로 시작, 1999년 영화 `간첩 리철진`의 각본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영화에 뛰어든 지 이제 13년차. 열 번째 연출작을 내놓으면서 스스로에게 조금은 대견하다는 생각도 한다.

"그동안 제작, 각본, 연출을 맡은 것을 합하면 약 300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린 것 같더라"라는 그는 "그렇다면 산업적인 면에서도 그다지 미안하지는 않으니 `그만하면 열심히 잘 왔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함께 해 온 선후배·동료 감독들이 점차 줄고 있는 상황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장 감독은 "90년대 후반부터 소위 천재 소리를 들었던 감독들이 기획 영화가 들어오면서 너무 빨리 사라진 것 같다"라며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갈려서 힘든 시기를 겪더라도 열심히 버티면 십 수년 할 수 있는 나같은 케이스가 일반적이 돼야 하는데…"라며 아쉬움을 전하기도 한다.

그래서 항상 그의 지론은 "중소 영화 제작사가 살아야 전체 한국 영화도 풍성해지고 대기업과도 윈윈할 수 있다"는 것.

마흔 고개를 넘어서면서 이제는 "찌질하게 관객 수 하나 하나에 집착하지 말고 그 시간에 좀더 고민한 작품을 내놓자는 생각"이라는 그는 내후년쯤엔 회사를 나와 `좋은 작가`가 되는 데 매진해 볼 생각이다.

올해 그는 7월께 촬영에 돌입하는 한중일 합작영화 `아시안 뷰티`에 이어 연말 연극 공연까지 빽빽한 스케줄이 이어져 있다.

바쁜 가운데서도 식지 않은 창작력을 고수하는 비결을 물어보니 "사람"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내 이야기의 아이템은 늘 사람과 내가 맞부딪치는 세상에서 얻었다. 아마도 사람을 계속 만나고 이 세상 속에 있는 한은 이야기는 계속되지 않을까"
 
(사진=권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