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파이트]'승자보다 빛난 패자' 격투기 기대주 정찬성
by이석무 기자
2010.05.16 08:00:23
[이데일리 SPN 이석무 기자] 23살의 대구 출신 파이터 정찬성은 일부 매니아들을 제외하고는 잘 알려지지 않은 종합격투기 선수였다. 적어도 지난 4월 25일전까지는 그랬다. 국내와 일본 등에서 활약하며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초라한 국내 종합격투기 환경에서 대중의 주목을 끌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번의 경기, 그것도 패한 경기를 통해 정찬성은 단숨에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그 전까지 정찬성가 누구인지, 뭐하는 선수인지는 몰라도 상관없었다. 어느 날 인터넷 화제로 떠오른 경기 동영상을 본 사람들은 누구라도 그의 경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정찬성은 지난 4월 2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 아르코아레나에서 열린 'WEC 48' 대회에 출전했다. WEC는 UFC의 모기업은 ZUFFA가 몇 해전 인수한 격투기 단체. 최고의 경량급 선수들이 주로 활약하는 메이저단체다. 쉽게 말해 '경량급의 UFC'인 셈이다.
그 대회에서 정찬성은 레오나르도 가르시아라는 강자와 대결을 펼쳤다. 가르시아가 미국 무대에서 떠오르는 기대주. 반면 정찬성은 '코리안 좀비'라는 별명 외에는 거의 알려진 게 없는 '무명'이었다.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정찬성 보다는 가르시아를 띄우기 위한 경기였다. 경기도 유료시청방식인 페이퍼뷰(PPV)가 아닌 무료 방송으로 중계될 만큼 비중이 떨어졌다.
하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니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첫 미국 무대 경기에서 정찬성은 가르시아와 3라운드 내내 엄청난 타격전을 벌이며 미국 현지 관중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백스텝 없이 오로지 전진밖에 모르는 정찬성의 투지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처음에 자국 선수인 가르시아의 이름을 연호하던 미국 관중들이 나중에 오히려 정찬성의 이름을 외칠 정도였다.
경기 결과는 가르시아의 2-1 판정승. 누가 보더라도 정찬성이 유리하게 경기를 풀어갔지만 결과는 반대로 나오고 말았다. 판정결과가 나오자 현지 관중들은 일제히 야유를 보냈다. 심지어 현지 중계진은 물론 UFC 대나 화이트 회장까지도 '판정이 잘못됐다'고 노골적으로 얘기했다.
하지만 패배의 실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비록 경기는 졌지만 정찬성은 승리 빼고 모든 것을 얻었다. 그 날 대회가 끝난 뒤 정찬성과 가르시아는 최고 경기를 펼친 선수에게 주는 '파이트 오브 더 나이트'상을 받았다. 그만큼 화끈한 경기로 대회를 빛냈다는 의미였다. 대전료가 5000달러였는데 상금이 6만5000달러나 됐다.
그 뿐만 아니었다. 정찬성의 경기는 현지에서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특히 UFC를 좌지우지 하는 화이트 회장은 정찬성의 열혈팬이 됐다.
화이트 회장은 "최고의 페이퍼뷰 경기였다. 오늘 날 UFC가 있게 한 포레스트 그리핀 대 스테판 보너의 경기 보다 더 뜨거웠다"고 말했다. 대회 후 기자회견에서는 아예 정찬성을 자신의 자리 옆에 앉힌 뒤 온갖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따로 정찬성을 불러 "우리는 네가 이겼다고 생각한다. 너무 실망하지 말아달라. 퇴출될 걱정은 하지 말고 부상이 나으면 언제든지 연락해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이후 열린 UFC 114 대회에선 아예 정찬성의 별명인 '코리안 좀비'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공식 계체 이벤트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국내에 돌아온 뒤 정찬성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격투기에 관심이 없는 팬들도 그의 경기 동영상을 다운받아 보기에 바빴다. 일약 무명 파이터에서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선수가 됐다. 정찬성으로선 그야말로 승리 빼고 모든 것을 얻은 셈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나서는 내가 무조건 이긴 줄 알았다. 판정이 내려진 순간 너무나 실망스러웠다"라고 당시 순간을 떠올린 정찬성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인터넷 반응이 뜨거워서 놀랐다. 지금까지는 받지 못했던 관심이었다"라고 말했다.
| ▲ WEC46 대회에서 상대 가르시아를 거세게 몰아붙이는 정찬성. 사진=Zuffa LLC |
|
정찬성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합기도를 배우면서 운동을 시작했다. 어릴 적에는 몸이 약하고 체격이 또래 다른 아이들 보다 왜소했다. 현 UFC 웰터급 챔피언 조르쥬 생피에르가 어릴 적 왕따신세를 면하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던 것 처럼 정찬성 역시 격투기를 시작한 이유는 '두들겨맞지 않기 위해서'였다.
격투기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고등학교 때 킥복싱을 배우면서부터. 킥복싱을 통해 격투기의 매력을 느낀 정찬성은 경북과학대 이종격투기학과에 진학했고 본격적인 파이터의 길로 접어들었다. 특히 2년전 현 소속팀인 코리안탑팀에 합류하면서 기량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국내와 일본 등에서 연승행진을 거듭하던 정찬성은 일본의 메이저대회인 '센고쿠' 출전 기회까지 얻었다. 센고쿠에서의 전적은 2승1패였지만 경기 내내 지칠 줄 모르고 밀어붙이는 그의 경기 스타일은 세계 격투기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미국 WEC가 정찬성을 주목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특히 정찬성의 별명은 '코리안 좀비'다. 얻어맞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앞으로 밀어붙인다고해서 붙은 별명이다. 코리안탑팀 체육관 동료들이 같이 연습하면서 붙여준 것이다.
정찬성은 "원래는 그냥 좀비였는데 일본에서 활약하면서 '코리안좀비'가 됐다. 내가 한국 선수라는 것을 알릴 수 있어 더 좋은 것 같다. 처음에는 별명에 대해 의아해하다가 경기를 보면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고 설명했다.
쉴새없이 계속 밀어붙이는 경기 스타일에 대한 우려도 없지 않다. 실제 정찬성은 가르시아와의 경기에서도 타격을 많이 허용했다.
하지만 정찬성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강조한다. "막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방어를 신경 안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꼭 물러서는 것만이 방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에는 경기 스타일을 고치려고도 해봤는데 오히려 그러면 더 경기가 안풀린다. 내 스타일을 버리려고 하면 더 힘들다. 이 스타일이 내 본능이다"라는게 정찬성의 설명이다.
| ▲ WEC46 정찬성의 경기 장면. 사진=Zuffa LLC |
|
무명 파이터에서 일약 한국 격투기를 대표하는 선수로까지 자리잡게 된 정찬성.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이제 메이저대회에 첫 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더구나 판정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데뷔전 성적은 패배였다. 정찬성이 여기서 결코 자만하거나 만족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더구나 정찬성이 활약하는 WEC 페더급(65kg 이하)은 세계적으로 가장 선수층이 두껍고 강자들이 많은 체급이다. 현 챔피언 호세 알도를 비롯해 유라이어 페이버, 마이크 브라운 등이 최정상급 파이터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레슬링 실력이 뛰어난 파이터들이 유난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느데 정찬성의 최대 약점은 공교롭게도 레슬링이다.
코리안탑팀의 전찬열 대표는 "타고난 근성이 좋은데다 신체조건도 세계적인 수준이다. 키가 크고 팔다리도 길다. 다른 선수들 보다 팔이 주먹 하나 정도 더 길다. 같이 타격을 섞으면 마지막에 이긴다. 또한 연습 때 실력을 경기에서도 100% 보여준다"라고 정찬성의 장점을 설명했다.
전 대표는 "투지나 정신력이나 운동능력 등은 엘리트 스포츠 출신이 아님에도 타고난 선수다. 코리안탑팀에 오면서 레슬링 연습을 하고 다양한 파트너와 스파링을 하면서 실력이 일취월장했다"라며"미국 무대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파이터로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기대했다.
정찬성은 미국에서 돌아온 뒤 곧바로 비염 수술을 받았다. 늘 호흡에 곤란을 겪었던 정찬성은 앞으로도 코로 충분히 숨을 쉬면서 경기를 할 수 있게 됐다. 비염을 완치하고 체력을 회복하면 WEC 출전을 위한 준비에 나설 예정이다.
정찬성은 "오히려 미국의 큰 무대에서 더 즐기게 되더라. 팬들의 환호성에 더 흥분됐고 꼭 이기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라고 미국 무대 데뷔전의 소감을 밝혔다. 아울러 "WEC에 출전하기 전에는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아졌다. 돈 걱정이 없어졌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롤모델 따위는 없다. 내 스타일이 제일 마음에 든다"라고 겁없이 말하는 정찬성은 "선수로서 목표는 챔피언이 되는 것이다. 세계 최고가 되고 싶다. 세계 최고 선수가 되면 나중에 그 명성을 가지고 스스로 격투기 대회를 열고 싶다는 꿈도 있다"고 힘주어 말앴다.